경주는 천 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도시다. 수많은 유적과 유물, 사적과 문화재가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유산을 두고 ‘찬란한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찬란했던 신라의 진짜 가치 중 하나는 그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있다. 신라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이방인을 받아들이고, 외국의 문물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낸 개방적인 사회였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산업로 동편에 위치한 원성왕릉은 당대 왕묘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이다. ‘괘릉’이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왕릉 테두리를 십이지신상으로 둘러싸고 난간을 설치한 구조로, 신라 왕릉 중 보존도가 매우 높다. 특히 이곳의 무인상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를 페르시아 등 서역인의 형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왕릉 앞에 외국인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당시 신라가 이방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울산의 처용설화는 신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온 외부 문화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삶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자 바다를 건너온 인물로, 신라에서 환대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궁중무용 ‘처용무’로 승화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신라가 외국 문화를 포용하던 개방적 사회였음을 상징한다. 심지어 페르시아 지역에는 신라의 공주가 시집을 갔다는 ‘쿠쉬나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유리병과 황금보검 등 서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는 신라가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까지 연결되는 해상 실크로드의 종점이자 다양한 문화가 어울려 살아간 국제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외국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하며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의 경주는 그 신라의 정신을 얼마나 이어받고 있는가? 현재 경주에는 제조업, 농업,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다. 이들은 단지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지역의 상점에서 장을 보고, 자녀를 키우고 축제에 참여하는 당당한 시민이다. 많은 외국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경제활동을 하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노동자’, 혹은 ‘외국인’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 시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경주의 또 다른 얼굴이며, 우리 삶과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다. 특히 그 변화는 어린 세대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현재 경주 시내권 초등학교에서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교실 안에는 다양한 언어와 피부색, 이름과 가족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며 자란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이 다양성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배우고 이해하며 자라는 법을 익힌다. 경주의 교실에서 자라고 있는 이 아이들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이들이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함께 살아가면서 자라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국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미 함께 살아가는 삶이 일상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신라는 외국 문화를 흡수해 더 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지금의 경주도,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처럼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다시 이 도시의 일부가 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을 손님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으로 맞이해야 한다. 개방은 과거의 자랑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다시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경주의 교실에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우리 도시의 미래는 이미 다문화 속에서 싹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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