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을 일컬어 예향(藝鄕)이라 부른다. 또는 항구가 아름다워 동양의 나폴리로 부르기도 한다. 예술의 고장인 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많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푸른색의 화가 전혁림, 청마 유치환, 극작가 유치진, 초정 김상옥 시인, 대여 김춘수 시인, 소설가 김용익 등이 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통영을 방문했다. 여인을 만나러 갔던 백석도 그곳에 시를 남겼다. 늘 궁핍했던 화가 이중섭도 통영에서는 잠시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곳이었다. 무슨 이유일까? 예술의 고장 통영 사람들이 경주를 노래했다. 그 흔적을 찾아가 보면 또 다른 경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청마 유치환(1908~1967) 청마 유치환 경주고교 교장(1955년 2월~1959년 9월)과 경주여고 교장(1961년 6월~1962년 3월)으로 두 차례에 걸쳐 5년 6개월 정도 경주에서 살았다. 「원원사지」, 「사면불」은 경주시절 발표한 대표적인 시이다. 청마의 경주시절은 그야말로 최고의 시기였다. 경주고 교장 부임 이듬해인 1956년 경북문화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예술원장 재연임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또한 시집 「제9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유치환 시선」과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발간했다.   그런가 하면 좋지 않은 일을 겪기도 했다. 1959년 9월 매일신문에 발표한 「최내무에게 고함」이란 글로 인해 경주고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1960년에는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청마의 시 「칼을 갈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같은 시편은 그의 강직한 성격과 뜨거운 피가 잘 나타나 있다. 경주 쪽샘골목의 데운 청주만큼 청마에게 경주는 뜨거운 시절이었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경주와 특별한 연고는 없지만, 1951년에도 경주고 교가(조지훈 작사)와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교가(윤경렬 작사)를 작곡했다. 어떤 연유로 연결고리가 없는 경주의 두 학교에 교가를 지어주었는지 궁금하다. 더듬어보면 1945년부터 유치환 시인, 윤이상 작곡가, 김상옥 시인, 전혁림 화가 등 젊은 예술가로 조직된 등 통영문화협회에서는 각종 시민강좌, 농촌계몽운동, 교가지어주기 운동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이 무렵 윤이상은 고향인 통영초등학교, 통영여중, 통영고와 부산고, 마산고, 고려대 등 모두 18곡의 교가와 응원가를 작곡했다. 이와 같은 교가지어주기 운동의 연장선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경주박물관 어린이학교의 교가는 1954년 개교 이듬해인 1955년에 만들어졌다. 윤이상 선생의 교가 친필 악보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보내 왔고 윤경렬 선생이 노랫말을 지었다. 세계적 작곡가와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윤경렬 선생의 작사라서 의미가 깊고, 경주에 윤이상 선생의 노래가 두 곡이나 있다는 것 또한 자랑할만하다. 초정 김상옥(1920~2004) 김상옥 시인의 첫 시집 『초적』에는 경주에 산재한 유물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옥적」, 「십일면관음」, 「대불」, 「다보탑」, 「무열왕릉」, 「포석정」, 「재매정」 등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발간된 여러 시집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주를 노래하였다. 경주 남산의 깨어진 불상, 경주박물관, 효불효교, 그리고 이차돈, 효녀 지은, 아사녀 신라 사람들을 작품으로 불러냈다. 초정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통해 민족 고유의 정신회복으로 노래했다. 경주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 대략 20여편이나 된다. 그의 시를 따라가면 경주의 웬만한 유적지는 모두 둘러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시조뿐만 아니라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싶을 만큼 빈틈없이 단단하다.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김춘수 시인을 두고 흔히 꽃의 시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무의미의 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든 시인이기도 하다. 경주를 노래한 시는 제11시집인 「꽃의 소묘」에 수록된 「운주雲珠」, 발표는 했으나 시집으로 엮지 않은 미간행작 「고도에서」, 그리고 지귀를 노래한 「타령조3」 등을 들 수 있다. 서너편 정도 꼽을 만큼 편 수가 많지는 않으나 대신 시집 한 권 분량의 서사시를 남겼다. 1975년 12월 발행한 제14시집 「낭산의 악성- 백결선생」은 적지 않은 분량의 장편 서사시다. 낭산에 살며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던 가난하고 검소한 백결 선생을 노래했다. 낭산을 중심으로 남산과 알천, 감포 바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서사시의 마지막은 ‘백결선생! 그대가 그대로 하나의 가락이로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은 신라의 신화적 인물 처용에 특별한 관심으로 만났다. 1963년 6월 《현대문학》에 소설 「처용」을 발표했으며, 이후 1965년 「잠자는 처용」, 1966년 「처용」, 「처용 삼장」 등 처용을 제재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처용단장」은 연작시로 《현대시학》에 1년 6개월에 걸쳐 연재했다. 처용이 들어간 시집으로 「처용」(1974),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등이 있다. 처용이라는 이름은 시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시대 경주에 살았던 처용은 오늘날 현대사회의 고독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김춘수 시인의 자전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박경리(1926~2008) 은행원 출신이기도 한 「토지」의 박경리 작가는 경주 출신 김동리 선생의 도움으로 등단했다. 시 쓰기를 원했던 박경리는 김동리에게 시를 먼저 보여줬는데 동리는 시보다는 소설을 써보라는 뜻밖의 권유를 받았다. 이에 박경리는 습작품 「불안지대」라는 소설을 김동리에게 보냈는데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 이 수록된 《현대문학》지를 우연히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등단도 김동리의 도움을 받았고 박경리(본명: 박금이)라는 필명도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동리와 경리 어딘가 닮아 있는 이름 같기도 하다.   그후 박경리는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차례 밝히면서 스스로 문학의 어버이라고 했다. 1988년에 출간된 시집 「못 떠나는 배」 속에 「춤」이라는 작품이 있다. 경주 서라벌의 대표적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화랑처럼 춤을 추고 싶었다처용처럼 춤을 추고 싶었다백결의 누더기 걸치고춤을 추고 싶었다.(이하생략)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이라도 하듯 2017년 6월 17일 기념우표가 나란히 발행되었다. 묘한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감의 도시 경주와 통영 경주를 노래한 통영의 예술가들을 생몰연대순으로 간략히 언급해보았다. 그들은 왜 이렇게 경주에 대해서 노래하였을까? 잠시 작가들의 작품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통영도 보이고 경주도 보일 것이다. 현대의 시인들이 좋아하는 최승자 시인도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경주와 통영을 예를 들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주와 통영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곳이다. 예술의 고장이라는 동질성을 가지는 두 도시는 갈수록 심화되는 서울 편중의 위기 속에서도 영원할 것이다. 다른 도시가 가지지 못하는 예술혼이 있고, 예술은 그 생명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전인식 시인(전문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