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킨과 니진스키는 발레뤼스가 자랑하는 에이스 안무가이며 무용수다. 그들은 100여년 동안 여성 무용수의 보조역할에 머물렀던 남성 무용수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루이 14세 시절 이후 다시 발레리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포킨(Michel Fokine, 1880-1942)는 마린스키 극장 출신으로, 발레뤼스 활동 전인 1905년에 절친인 파블로바(Anna Pavlova, 1881-1931)를 위해 안무한 ‘빈사의 백조’로 유명하다.   빈사의 백조(La Mort du Cygne)는 짧은 독무 작품으로 생상스(Camille Saint Saens, 1835-1921)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음악이 사용되었다. 관객들은 한 마리 백조가 처절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죽어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이후 발레뤼스에서 수석안무가로 활동하며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 중 ‘불새’와 ‘페트루슈카’를 안무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발레뤼스에 오래 몸을 담진 못한다. 디아길레프가 자신의 경쟁 상대인 니진스키를 총애하면서 틈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포킨은 191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귀화한다.   프티파가 ‘고전발레’의 아버지라면, 포킨은 ‘모던발레’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전발레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레 혁신을 위한 5대 원칙을 주창하면서 오늘날 발레혁신가로 평가되고 있지만, 어나더 레벨의 천재였던 니진스키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마치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관계를 보는 듯하다. 한편, 포킨은 춘향전을 각색하여 만든 발레 ‘사랑의 시련’을 193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초연한 바 있다. 여주인공의 이름이 ‘충양(Chung Jang)’이고, 남주인공이 암행어사처럼 사악한 서양대사의 재산을 몰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포킨처럼 마린스키 출신인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는 무용의 신이라 불린다. 163cm 작은 키와 짧고 굵은 다리는 이상적인 발레리노와는 거리가 멀지만, 도약만큼은 일품이라서 새처럼 오래 공중에 머물렀다. 발레뤼스에 에이스 무용수로 참여하여, 1911년 페트루슈카로 당대 최고의 무용수가 된다. 1912년에 자작자연한 목신의 오후(L’Aprés-midi d’un faune)로 파리 문화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천재성을 과시한 니진스키는 1913년엔 포킨을 제치고 봄의 제전의 안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곧 니진스키의 불행이 시작되고 만다.   같은 해에 니진스키는 동성 연인 사이로 알려진 디아길레프 없이 남미 순회공연을 하다 헝가리 백작의 딸인 로몰라(Pulszky Romola, 1891-1978)를 만나게 된다. 로몰라는 발레뤼스의 신입단원으로 남미투어를 함께 하던 중 우상 니진스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리는데 성공한다. 연인을 빼앗긴 디아길레프는 격분하여 발레뤼스에서 니진스키를 제명한다. 그리고 다른 밥줄도 끊어버린다. 이후 니진스키는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으로 남은 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니진스키의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십 년은 배우고, 십 년은 춤추고, 그리고 나머지 삼십 년은 암흑과 침묵 속에 가리어진 육십 평생’이라고. 그는 1950년 영국 런던에서 신부전증으로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3년 뒤 파리(몽마르트 묘지)로 이장되었다. 발레 인생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곳에서 영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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