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다”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烈, 1916~1999) 선생이 자서전에서 밝힌 말이다. 이 세 가지 일생의 정체성은 모두 경주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양분으로 이 땅에서 꽃피운 일들이다.    그동안 우리는 선생을 부를 때 마지막 신라인, 영원한 신라인, 향토 사학자, 미술 교사, 공예가, 조각가, 화가, 경주의 소파 방정환, 마을문고 선구자 등등의 수식어를 앞세워 붙였다. 그만큼 다양한 재능을 다방면으로 펼치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실 때까지 50년을 산 경주에서 제대로 ‘경주인’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경주인들은 늘 ‘이북내기’ 이방인으로 대하며 텃세를 부리곤 했다. 선생이 떠난지 어언 25년이 되어가니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들도 장년층에서나마 가끔씩 볼 수 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27세의 어린 나이에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5년을 머문 뒤 32세에 경주에 안착했다. 반세기를 경주에서 사는 동안 누구보다 더 경주를 위해 ‘경주인’으로 살았다. 경주 사람보다 더 경주를 사랑한 윤경렬이었다. 풍속 인형의 원류를 찾아 일가친지는 물론 일면식 하나 없는 경주에 뿌리를 내렸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보다 혈연, 지연, 학연의 보수성이 강하고 배타적인 경주에서 전업 작가의 길을 가지 않고 우리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풍속 인형(토제 기념품)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자영업자요 공예가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최고의 작가였다. 해방 전 미술계 최고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2년 연속으로 입선한 실력자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역사 문화의 아름다운 가치를 바르게 알고 긍지를 일깨울 사명으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38세 경주안착 6년 만의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인 이 학교에서 배출한 7000여 제자들 가운데는 국립박물관장, 학예사, 교수, 교사, 예술가, 공예가, 고고미술사학자, 저명인사 등이 수백명에 이른다.    선생은 일찍이 고향의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개성에서도 미술 교사로 활동하였고 경주 근화여자중·고등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박물관학교와 더불어 신라 천년의 왕도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일반인에게 알리고자 1956년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하고 매월 시민강좌를 연 것이 어언 800여회, 70년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의 삶은 이렇게 신라의 얼과 혼, 역사와 문화에 동화되고 신라인처럼 신라를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이는 살고 있는 경주에 잇닿아 옛 영광을 되살려내는 데도 애썼다. 신라인들이 입던 옷을 고증하고 설화나 전설의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일에 매진하여 신라문화제 가장행렬의 모습들을 도맡아 기획했다. 노천박물관이라 하는 경주 남산의 문화유산을 일일이 답사하고 조사하여 펴낸 ‘경주 남산 고적 순례’는 경주 남산을 재탄생시키는 계기였다. 풍속 인형(토우) 때문에 경주를 선택한 선생은 토우의 모습을 알기 위해 경주의 유적지를 헤매고 다녔다. 남산을 오르며 깊이 박힌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 ‘신라이야기’, ‘신라의 전설’,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 ‘경주박물관학교 교본 1, 2’, ‘불교 동화집’, ‘경주 남산 1, 2’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선생은 경주에 턱 들어서는 순간 ‘경주에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한 것처럼 그리했다. ‘경주에서 꼭 살고 싶은 곳이 양지마을이다’는 소원처럼 선생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살던 집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매입하여 보존하고 신탁과 경상북도, 경주시가 지원하여 ‘고청 윤경렬 선생 기념관’을 건립하고 2022년 12월 개관했다. 개관할 때 내부 전시장 구성과 외부 조경 등을 경주시가 지원하였고 기념비 이전과 외부 화장실 개보수 등도 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기념관 운영은 ‘고청기념사업회’가 맡고 있다. 신탁에서 지원하는 월 50만원의 건축물 관리비 외에는 전적으로 모든 경비를 기념사업회가 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연중 개관일의 당번도 순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완전 무보수로 점심 도시락도 본인이 준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동참하는 분들은 교수에서 전직 시·도의원, 교사, 고위 공무원 출신 등 다양하다. 선생은 떠났어도 떠난 것이 아닌 것이다. 역사 문화도시 경주에 생명을 불어 넣은 분, 경주인 보다 더 경주를 사랑한 분이었기에 그렇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50인에 이르는 개인 기념관의 관리나 운영,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두고 있다. 타 도시에서는 현재 생존 인물까지 기념관을 만들기에 수십억원을 쏟아붓고 있다. 불타오르는 예술혼과 역사관, 어린이 교육의 정신을 경주에 심은 윤경렬! 그를 이제는 ‘경주인’으로 치켜세웠으면 한다. 우리가 그를 경주 사람으로 높이 받들 수 있는 것은 역사문화도시 경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뜻을 잇고 있는 기념관을 지원할 근거가 되는 경주시 조례 제정을 소망해 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