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동 양지마을, 기와를 얹은 옛집인 고청생활관과 철제 패널의 현대건물인 고청기념관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살아낸 삶의 흔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 뜻을 이어가는 전시공간이다. 고청생활관에는 선생이 피난 시절 형에게 전달하기 위해 간직했던 축음기를 비롯해 손때 묻은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옆 고청기념관에는 풍속 인형과 토우, 어린이박물관학교 관련 자료, 그리고 ‘경주남산고적순례’ 초판과 저서, 당시 활용했던 교육용 자료 등이 함께 정리돼 있다.
특히 고청옛집이라 불리는 생활관에는 고청방을 중심으로 안방, 문간방, 사랑방, 대청마루 등이 전시 및 소모임, 차담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외부 정원과 마당은 정성이 깃든 손길로 사시사철 꽃들이 피고 지며, 아늑한 고향집이나 외갓집에 온 듯한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생전 윤경렬 선생의 집에는 예술인, 역사문화인,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오는 즉시 문화공간으로, 연구소로, 교육장소로 탈바꿈했다.
생활이 곧 문화가 되는 곳이었다. 현재도 이곳은 고청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 윤경렬 선생의 제자들과 유족들, 그리고 뜻있는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지키고 가꾸며 고청 선생의 살아생전처럼 많은 시민들, 관광객 혹은 그리움으로 찾는 이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도록 관리하고 있다.
경주로 향한 손끝, 윤경렬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이곳에서 윤경렬(1916~1999) 선생은 평생을 바쳐 ‘진정한 한국의 미’를 찾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미를 손끝으로 빚고 경주의 역사와 정서를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한 문화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함경북도 주을면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인형 제작을 배운 뒤 개성에서 ‘고려인형사’를 열었다.
하지만 당시 개성박물관장 고유섭 선생은 “손끝에 밴 일본의 독소를 빼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 혹평했고, 오지호 화백은 “우리의 미는 우리 땅에서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두 사람의 조언이 그가 경주행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경주에 정착한 그는 토우를 만들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산을 걸었다. 신라 토기와 불상, 그리고 손으로 배우는 전통 교육의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보이지 않는 교육자
그는 공적인 직함보다 현장에서의 교육을 선택했다. 정규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소외됐고,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외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박물관학교를 만들었고 신라문화동인회를 조직해 전통문화 교육과 지역 문화운동의 뿌리를 만들었다.
어린이박물관학교 아이들은 흙을 만지고 토우를 빚었고, 남산을 걸으며 하늘과 땅을 교실삼아 전통을 손끝에서 배우고 기억했다. 남산의 석불 하나, 바위 하나도 교과서가 아닌 발 아래에서 만나는 역사였다. 이러한 체험형 교육은 시대를 앞서갔으며, 윤경렬 선생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화는 결국 사람으로 완성된다
많은 이들이 고청옛집과 마당, 꽃들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윤경렬 선생은 마당을 가꾸고 풀을 뽑으며 대청마루에서 차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누군가는 마당을 쓸고, 누군가는 꽃을 심고, 누군가는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현재 고청기념관에서는 가족 토우 체험, 달빛 음악회, 그림·사진전, 인문학 강연, 가야금 연주회, 남산 답사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이 밖에도 시민 참여형 독서모임과 소규모 강연, 릴레이 전시가 정기적으로 운영되며 살아 숨 쉬는 경주의 문화현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한 유물이나 조형물이 없이도 한 사람의 삶과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고청생활관과 기념관은 지금 경주가 놓친 한 사람의 뜻을 시민들이 스스로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관람정보]위치: 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운영시간: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월요일 휴관)운영: 고청기념사업회 (문화유산국민신탁 위탁)전시: 고청 유품, 풍속 인형, 수기, 토우프로그램: 릴레이 작가전, 어린이 체험, 남산답사, 숙박형 문화교육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