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읍 나정리에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은 것을 기념해 후세 사람들이 세웠다는 ‘만파정(萬波亭)’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과거에는 만파정 복원이 시급하다는 여론도 있었다.
본지가 25년 전인 1990년 5월 4일자 신문(제21호)에서 만파정 복원과 관련한 보도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먼저 당시 보도 기사를 소개하면 이렇다.만파식적, 잊을 것인가신라 전설 깃든 유서 깊은 유적지해방 이후 황폐, 흔적 없어정신문화 보고 가치 높아 경주관광개발공사(현 경북문화관광공사)에서 연초(1990년초) 경주군 감포읍 일대에 제2 관광단지 조성계획안을 발표한 이후 문화재 관계자들은 물론 현지 주민들 간에도 문화재 파괴에 따른 우려를 크게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이미 황폐화된 ‘만파정(萬波亭)’을 복원시켜야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일고 있다.
만파정은 신라시대 전설상의 피리였던 ‘만파식적’을 불었던 장소로 현지 주민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위치는 감포읍 나정1리 산 106번지로 확인되고 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보리밭으로 변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주민들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개의 정각(亭閣)과 부속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당시 초등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의 교사(교실)로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주민 정모(감포 나정1리·71) 씨는 해방 이후 만파정이 개인 소유로 넘어가면서 정각이 하나 둘씩 없어지게 됐다며 점차 황폐화돼가고 있는 문화재의 보호 측면에서 자리만이라도 그대로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 지역 젊은이들조차 만파정 자리를 모르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실제 만파정 자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곳 일대는 경주개발공사에서 추진하고 있는 제2 보문관광단지 조성계획안의 일부 부지로 매입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재는 최모씨의 개인 소유인 보리밭으로 변해 주춧돌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미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상태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개인 묘터로 이곳을 매수하려는 외지인이 다녀간 적까지 있어 이곳 주민들은 전통 문화재의 완전 멸실이라는 점에서 크게 우려를 나타내고, 정신문화보고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만파정이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파정은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은 후, 문무왕이 죽어서 된 해룡과 김유신이 죽어서 된 전신이 합심해 용을 시켜서 보낸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만파식적을 불었던 자리다.
신라인들은 만파식적을 불면 소원 성취가 이뤄져 국보로 삼고 신중히 여겼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이 같은 25년 전 본보 기사 이후에는 아쉽게도 만파정 복원과 관련한 속보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2006년 1월 23일자(제732호) 신문에 당시 기획특집 ‘마을을 찾아서’ 감포읍 나정리편에서 만파정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당시 기사에는 나정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와 만파정터임을 추정하는 기사를 실었다.
감포읍 나정리(羅亭里)는 신라 삼보의 하나인 만파식적을 얻은 것을 기념해 후대에 지은 만파정이 있다고 해서 신라(新羅)의 ‘나(羅)’자와 만파정(萬波亭)의 ‘정(亭)’자를 따서 나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만파정(萬波亭)터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기념해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정지를 지어 만파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밭이 돼 있고, 이 밭 주변에는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널려 있어 만파정이 있었던 자리라는 마을주민들의 이야기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서편 등성이에 있는 밭이다. 또 만파정은 문헌 기록에도 등장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8대손인 이정엄(李鼎儼, 1755~1831)이 쓴 동해유행기(東海遊行記)에는 만파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동해유행기는 1804년 3월 10일부터 22일까지 13일간 그가 경주와 울산 등의 동해를 다니면서 남긴 글이다.
이 중 이견대를 방문하면서 만파정을 기록했다.3월 20일. 아침에 또 해돋이를 보았는데 바다의 구름에 막히고 희미하여 오히려 동축사에서 본 것보다 못하였다. 해창에 걸린 만파정(萬波亭) 편액(扁額)은 제학(提學) 홍양호가 섰고 부윤 이상도가 제영(題詠)한 현판이 있었다.=출처: 이정엄의 동해유행기 이 글에 대한 해석에는 1804년 3월 20일 당시 만파정 편액이 해창, 즉 창고에 걸려 있었다고 하니 이미 허물어져서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990년 본보 보도와는 달리 만파정은 조선시대 이미 붕괴됐다는 기록이다. 지금으로서는 근대까지 만파정 건물의 유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만파정이 실존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실존했던 만파정, 이젠 관심이 필요할 때
신라 3기8괴(三奇八怪) 중 하나인 옥피리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장군의 혼령이 보낸 선물로 전해지고 있다. 적군을 물리치고 가뭄에는 비를 내리게 하며 파도를 잠들게 했다.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뜻에서 만파식적(萬波息笛), 또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한다.
만파식적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다. 하지만 만파식적을 얻은 것을 기념해 지었다는 만파정은 문헌 등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음에 따라 실존했던 정자였다. 위치 또한 이견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는 현재 감포읍 나정리 고운모래해변 일대에 잠수풀, 온수풀, 해상스카이워크, 만파식적 공원 등 다양한 해양레저 시설을 조성하는 ‘해양레저관광 거점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사업비는 49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지난 1월엔 사업에 대한 주민설명회를 열고 사업계획 초안과 추진 현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업에 실존했던 만파정의 재현 또는 복원 계획이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파정의 재현 또는 복원은 만파식적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질 수 있어 경주만의 관광자원이다. 이견대와 올해 개관 예정인 문무대왕해양역사관, 그리고 문무대왕 수중릉 등으로 연계되는 매력을 지닌 만큼 만파정의 재현 또는 복원이 갖는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