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초연 당시 유럽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발레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은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서 산 제물을 바치는 이교도들의 의식을 담고 있다.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 ‘대지에 대한 찬양’에서는 초록의 나무와 꽃으로 뒤덮인 대지에서 젊은 남녀들이 춤을 추며 행복한 미래를 기원한다. 2부 ‘희생제’에서는 그 젊은 남녀들이 봄을 맞기 위해 한 처녀를 희생시키는 의식을 시작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를 뽑은 다음 젊은 남녀들이 그 주위를 돌며 봄의 영광을 찬양하는 춤을 춘다. 신에게 바칠 제물로 선택된 처녀가 희생의 춤을 춘 후 죽고, 남자들이 그 시체를 들고 나가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꿈에서 비롯된 봄의 제전은 내용부터 이처럼 원시적이고, 이질적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원시적인 소재를 그리던 화가 뢰리히(Nicholas Roerich, 1874~1947)에게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겼다. 그리고 전작 ‘페트루슈카’를 함께 한 희대의 발레리노,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에게 안무를 의뢰했다. 니진스키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움직임을 도입했다. 무용수들은 몸의 각 부분을 따로따로 움직여야 했고, 동작도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봄의 제전만을 위해서 그동안 익혔던 발레 동작과 완전히 반대되는 낯선 동작을 익혀야 했다. 발레가 고전발레에서 모던발레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봄의 제전 초연의 해프닝은 이렇듯 충격적인 발레 안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봄의 제전이 어려웠던 것은 안무뿐만 아니라 연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빈스키는 ‘페트루슈카’를 지휘했던 몽퇴(Pierre Monteux, 1875-1964)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몽퇴는 오케스트라와 무려 열여섯 번의 강도 높은 리허설을 행한 후에 무대에 올랐다. 한두 번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던 발레나 오페라와의 반주와는 사뭇 달랐다. 초연 내내 난동에 가까운 관객들의 반응에도 꿋꿋하게 연주를 마쳤다. 봄의 제전 초연은 격렬한 찬반양론 속에 끝났지만 다행히 후속 공연은 큰 문제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초연의 해프닝이 봄의 제전의 ‘화제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봄의 제전은 천년을 내려온 선율과 화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리듬’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음악사의 일대 전환이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원시시대로 회귀했지만 이를 작품에 담는 방식은 미래지향적이었다. 초연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니진스키의 안무와 디아길레프의 속물적인 근성에 잔뜩 화가 났었다고 한다. 그는 1년 후에 봄의 제전을 발레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둔다.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 없이 오직 몽퇴의 오케스트라만으로 거둔 성과였다. 1921년에는 마신(Leonide Massine, 1896-1979)의 새로운 안무로 발레 공연도 무대에 올렸다. 마신은 니진스키보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던 안무가였다. 봄의 제전은 베자르(Maurice Bejart, 1927-2007)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와 같은 현대무용의 거장에게도 계승되었다. 지금도 봄의 제전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모티브를 듬뿍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관인 퐁피두 센터(Pompidou Center) 옆에는 ‘스트라빈스키 분수’가 있다.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Phalle, 1930-2002)과 그의 남편 장 팅겔리(Jean Tinguely, 1925-1991)가 만든 것이다. 이방인 작곡가가 파리에서 만든 ‘봄의 제전’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봄의 제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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