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주는, 세계인의 시선 앞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왕릉군이 주는 고유의 분위기만으로 충분할까. 지금 경주는 ‘기억되는 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무형의 콘텐츠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유형문화재는 과거의 유산이지만, 오늘의 경주는 그것을 해석하고 새롭게 계승할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 해답 중 하나는 바로 ‘사람’이다. 전통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해온 인물을 통해, 경주의 정체성과 미래 가치를 세계에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고청(高靑) 윤경렬 선생(1916~1999)은 경주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물이다. 필자는 이전에도 APEC의 문화적 비전을 고청 윤경렬 선생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단순히 인형을 복원한 장인이 아니었다. 전통과 교육, 예술과 철학을 아우른 실천가이자 사상가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인형 제작 기술을 익힌 그는, 조선인의 미의식을 되찾기 위해 1943년 개성에 ‘고려인형사’를 세우고, 해방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주로 내려와 ‘고청사’를 열었다. 그리고 신라문화동인회를 조직하며 전통예술의 복원과 교육에 나섰다.
특히 윤경렬 선생이 설립한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는 오늘날에도 새겨야 할 문화교육의 본보기다. 단순히 전통문화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직접 보고 만지며 우리 문화의 근간을 몸으로 익힐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전통을 살아있는 교육으로 끌어올린 전례 없는 시도였다. 더불어 그는 남산의 가치를 누구보다 앞서 주목했다. 신라의 석불과 마애상, 그에 깃든 정신성과 미감을 어린이들과 시민들에게 알리며 자연과 전통을 통합한 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이러한 고청의 교육철학은 단지 지역적 실천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미의식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자,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문화 비전이다. APEC이 지향하는 포용성과 공동 번영의 가치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고청기념사업회의 오랜 노력 끝에 선생이 생전 머물던 고택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매입했고, 2022년 12월 드디어 염원하던 ‘고청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완의 상태로 개관 이후 지금까지, 기념관은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 지원도 없이 오직 시민들의 후원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이는 기적과 같은 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문화정책의 민낯을 보여주는 현실이다. 경주가 빚지고 있는 이 한 인물의 가치조차 행정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시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지금이라도 문화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한다. 고청기념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적정한 예산을 확보하고, 전문 큐레이터와 기획 인력을 배치해 콘텐츠 수준을 국제 기준에 맞춰야 한다. APEC 기간에는 ‘고청 문화교육 특별전’과 국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고청의 미학과 교육철학’을 세계무대에 공식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나아가 APEC 이후에도 기념관을 거점으로 한 어린이 문화교육 프로그램, 지역 장인과의 연계 교육, 전통 인형 공예 체험관 운영 등 지속 가능한 문화 콘텐츠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APEC은 문화 경주가 스스로를 세계에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다. 이 회의는 단지 경제협력의 장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서로의 문화적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문화외교의 장이다. 그 속에서 ‘고청 윤경렬’이라는 이름은 한국적인 미의식, 공동체 교육,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키워드를 담은 강력한 문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윤경렬 선생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이유는 과거를 기리는 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경주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문화의 힘으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출발선이다. 윤경렬이라는 인물은 경주의 유산이자, 세계를 향한 경주의 언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주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문화도시는 유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윤경렬 선생처럼 한국의 미를 탐구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려 했던 사람, 그리고 그를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의 자산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또 다른 고청 윤경렬을 찾고, 만들고, 길러내야 한다. 일본 가나자와는 우치다 마키코라는 전통공예가를 통해 현대 공예를 세계적 문화담론으로 확장했고, 프랑스 파리는 장 누벨의 건축을 통해 도시정체성과 예술의 융합을 이루었다. 중국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계승자’ 제도를 통해 전통 장인들을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경주 역시 ‘사람 중심의 문화정책’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설계해야 한다. 고청 윤경렬은 그 시작일 뿐이며, 경주는 더 많은 고청을 발굴하고 키워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