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이 가장 열심히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던 시기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한 1919년부터 독립자금 대는 일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후 주주 간 분쟁으로 안희재 선생과 대표이사직을 맡았던 문파 선생이 물러났던 1925년 사이가 절정기라 할 수 있다. 뒤에 백산은 다시 임원을 지냈지만 문파 선생은 주주의 자격만 가졌을 뿐 다시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돌아가지 못했다. 문파 선생은 이 6년 동안 한 편으로는 독립자금을 보내고 한 편으로는 국내 지사들과 힘을 모아 내밀하게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반드시 밟히는 법이어서 문파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일본 경찰이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평양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가 3개월 동안 조사를 받으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문파 선생의 독립운동은 이미 그 이전부터 다방면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기록이나 문서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보는 게 옳은 것이, 이미 1909년 이후부터 시작해 수많은 독립지사들과 다양하게 인연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별로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동청년당과 조선국권회복단, 광복회에서 활동한 문파 선생, 3개월 옥고 치른 후 후유증 시달려! 가장 초기의 활동이 ‘대동청년단’이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에 결성되어 1920년대 중반까지 활약하던 항일 비밀운동단체로 부산의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그 운동권을 넓힌 독립운동단체다. 워낙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그 면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전국적으로 80여명이 알려져 그 조직적인 규모를 알 수 있다. 뒤에 신민회의 등 주요 독립운동단체의 요인들이 이 단체에서 활약했던 점을 보며 이 회가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동청년단과 관련한 문서에서 문파 선생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대동청년단의 주요 인물이 뒤에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연 안희제 선생이라는 점, 특히 동생인 최완 선생이 이미 단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막후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어떤 식으로건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최완 선생은 자신의 독자적인 뜻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을 수 있지만 당시는 문파 선생이 전격적으로 집안을 통솔하고 있었을 때이던 만큼 충분한 상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특히 뒤에 이승만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신성모 씨와 내무장관을 지낸 김효석 씨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의 눈을 피해 경주 최부자댁에 숨어 있은 것도 최완 선생과의 친분 때문이었는데 이때 두 사람을 도와 해외로 도주시켜 준 장본인이 문파 선생이기도 했다. 이 사례만 봐도 최완 선생이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기보다 문파 선생과 긴밀히 상의했다는 정황을 알 수 있다. 1915년 1월 5일에 발족한 ‘조선국권회복단’은 문파 선생이 정식 단원으로 참가했고 선생의 처삼촌인 김응섭 선생과 사촌 자형인 박상진 의사가 함께 참여한 조직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특히 이 시기는 국내에서의 활동에 압박받으면서 많은 지사들이 간도로 옮겨가기 시작하던 때다. 간도로 옮겨간 지사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항일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바로 이 무렵 국내에서는 독립운동 지사들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국외로는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계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보다 구체적인 문파선생의 독립 의지는 1915년 7월에 결성된 광복회에 참여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 광복회의 총사령은 사촌 자형인 박상진 의사이고 종내외종 사이인 이복우 선생이 사무를 총괄했고 문파 선생이 재무부장으로 참여했다. 이복우 선생은 소정 이씨 후손으로 그 역시 천석 넘는 부자였다. 종내외종이란 저쪽에서 보면 문파 선생이 외6촌인 친척을 일컫는다. 이 광복회는 뒤에 박상진 의사 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국내 친일 부호 척결과 관련하여 일경들에 노출됨으로써 박상진 의사를 비롯해 무려 61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끝에 사형되거나 실형을 사는 등 비극적 종말을 고한다 문파 선생은 광복회 재무부장이었으나 다행히 이때의 체포에서 벗어나 61명 체포자의 명단에서는 빠져 있다. 이는 당시 선생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독립자금 전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표면에 나타나는 일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파 선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남겨야 할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갈수록 적자가 나고 운영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측에 교역 물건이 가면 현지의 업자가 물건만 받고 대금을 치르지 않고 잠적하거나 제때 대금을 주지 않는 등의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건들이 실상은 독립군에게 자금이 전달되는 경위였다. 문파 선생은 그런 한편 국내에서 모은 돈을 은밀히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일도 병행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그렇게 허술하지만은 않았다. 결국 자금을 나르던 중에 사고가 터져 문파 선생은 평양경찰서 소환으로 평양까지 불려가게 된다. 여기서 선생은 무려 3개월 동안 감금당한 채 모진 고문과 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는 당시 문파 선생의 고초를 잘 보여준다. “하필 조사받는 기간이 겨울철이라 할아버지께서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셨어요. 특히 감옥이 얼마나 추웠던지 동상으로 할아버지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안쪽으로 굽어서 노년에 이르도록 큰 불편을 겪기도 하셨지요!” “나는 빚진 사람... 누구는 목숨을 잃거나 팔다리를 잃었고 누구는 몇 년씩 형무소 신세를 졌는데 나는 돈만 보냈잖아!” 최염 선생을 통해 들은 문파 선생의 회고는 아래와 같다. 평양경찰서 취조 형사는 독립운동 자금 운반으로 보이는 혐의자를 붙들어 수사하는 과정에서 최준이라는 이름을 주목했다. 그래서 평양까지 문파 선생을 호출해 압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파 선생은 무조건 모르쇠로 버텼다.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는 자백이 나왔다는 취조에 대해 무역회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각지로 돈을 보냈고 그런 일이 하나둘이 아닌데 누가 누군지를 어떻게 다 알겠느냐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일경들이 호락호락 문파 선생을 놓아줄 일도 아니었고 비록 강고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평생 동안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사신 문파 선생이었던 만큼 평양경찰서에서의 옥고는 무던히도 힘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잠깐 최염 선생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문파 선생의 육성을 복기해 보자. “춥고 배 고푸고… 뭣보담도 일체 사람을 만날 수 없으이 그게 힘들었지러. 혼자 가두어 놓고 매칠 마다 한 번씩 불쑥 와가는 누구누구를 아느냐? 어떤 관계냐꼬 묻고 또 휙 가삐리고… 그런 일이 석달이랐으이까네….” 문파 선생은 그래도 그때의 일이 오히려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었던 듯 후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최염 선생의 회고다. “그랬제. 독립운동한다꼬 누구는 목숨을 잃고 누구는 팔다리가 병신이 되고 누구는 몇 년씩 형무소 신세를 졌는데 나는 편안하이 지내믄서 돈만 보내믄 댔잖아. 다 제각기 역할이 있다 카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인테 늘 빚진 기분이랐지러…!” 3개월 동안의 취조 후 경찰은 증거불충분이란 이유와 한편으로는 징역을 살리기보다 뒤를 캐기 위한 목적으로 문파 선생을 풀어주게 된다. 물론 선생이 이런저런 연줄로 사람을 대어 구명운동을 한 덕분이기도 하고 명확한 증거를 잡지 못한 경찰이 영남 일대 인심을 얻고 있는 선생을 지나치게 오래 감금함으로써 얻을 데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절한 선에서 풀어주었을 것이라는 게 문파 선생의 해석이었다고 한다. 최염 선생은 당시 할아버지의 옥고 후유증을 자신 역시 오래 지켜보았다고 술회했다. “이 옥고로 인해 할아버지께서 발가락에 심한 동상을 앓으셨는데 그때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부러져 안쪽으로 휜 바람에 발톱이 안으로 파고들어 내내 고생하셨어요. 뒤에 경주 남산에 있는 와룡암이란 곳에서 정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발가락 때문에 내가 직접 내남까지 의원을 모시러 간 적도 있었지요!” 문파 선생은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나오자 몸을 추스르기 위해 며칠 쉰 후 평양 일대를 돌아보고자 했던 모양이다. 유적 보호에 관심이 많아 한편으로는 뒤에 친일단체로 평가되기도 한 경주고적보존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만큼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관심이 갔을 법하다. 선생은 여관을 하나 잡고 평양을 잘 아는 사람을 구해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옛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망중한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곳에 이르니 아주 넓은 땅이 쓸모없이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알아보니 그 땅은 당시의 평양 시내에서는 다소 떨어진 곳이라 경주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다. 선생은 평양에 온 인연과 감옥에 갇혀 고생한 기념이라 여겨 그 넓은 땅을 사두고 경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딱히 관심을 가지지 못해 땅은 거의 버려두다시피 한 모양이다. 몇 해가 흐르고 난 뒤, 갑자기 공주헌병대에서 사복 대원 두 명이 와서 헌병 대장이 문파 선생에게 공주로 와 줄 것을 요구했다.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아 평양에서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는 선생은 상당히 긴장하며 공주헌병대로 따라갔다. 또 어떤 암울한 먹구름이 선생을 향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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