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를 지나 외동 방향으로 7번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마석산(磨石山)이 우뚝하게 서있다. 마석산은 내남면 명계리와 외동읍 제내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꺼비, 맷돌, 대포, 유두, 가시개 등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아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마석산 동쪽기슭의 북토(北吐)마을은 신라 때 큰 못인 샘못[토상지(吐上池)]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적으로 남쪽의 제내리와 냉천리, 북쪽의 정래동과 시래동, 동쪽으로 방어리와 죽동리, 서쪽은 내남면 명계리와 이어져 있다. 외동읍 북토마을 안 북토소류지를 지나 마석산 산자락에 이르면 석은(石隱) 박이민(朴以敏)을 모신 석은재(石隱齋:북토안길 49-32)가 나타난다. 비선문(飛仙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좌측에는 ‘密陽朴氏石隱公支下塋苑’이 있다.
박이민은 인조년간에 처사로 살면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효도와 공경 그리고 충심과 신의로 여러 유생을 훈도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의 존재를 알기에는 문인들의 글이 너무 소략하고, 그나마 족보를 통해 그의 행적을 다소 확인할 수 있다.
박이민은 인조 때 통정대부 첨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한다. 선대의 내력을 보면 “사헌부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1253~1340)부터 호조전서 박침(朴忱)은 고려 말기에 의리를 지키다 자결하였고, 아들 박강생(朴剛生,1369~1422)은 집현전 제학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들 박공문(朴功問)은 태종년간 좌찬성 밀성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단종년간 좌참찬 밀성군에 봉해졌다. 아들 박건(朴楗,1434~1509)은 중종년간 좌찬성 밀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아들 박승약(朴承爚)은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을 지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진계(進階)되었다. 아들 박분(朴芬)은 성균관 생원으로 중종년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양주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여러 세대를 월성의 동쪽에서 머물렀다”라며 경주에 세거한 내력을 언급하였다.
기묘사화는 훈구파가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 삭제를 빌미로 조광조 일파의 급진 개혁 정책을 막았고, 이로인해 많은 사림파가 사약과 유배를 당하였다. 이 시기에 박분이 경주로 내려왔고, 그로부터 네 세대를 지나 박이민이 광해년간에 태어났다.
정묘년(1987) 음력 5월에 지은 「석은재기」를 보면, 집안에서 재실 건립을 도모한 내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경주부 동쪽 30리쯤 마석산 그 아래에 북토(北吐)마을이 있는데 박씨가 머물러 산지가 이미 십여 세대가 지났다. 마을 뒤에 우뚝한 봉우리 배석봉(拜石峰)이 있는데 통정 첨부를 지낸 밀양박씨 석은 박이민 공께서 살던 곳이다. 의례의 물품을 갖추고 숭배하였고, 봄과 가을 강신제(降神祭) 즈음에 제관이 재소(齋所)에서 지낼 공간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을축년에 후손 박정래(朴炡來), 박용래(朴庸來), 박양래(朴陽來)가 여러 족친에게 묻고 도모하며 말하길, “우리 집안은 예부터 가난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겨를이 없었지만, 선조의 묘소 역시 재실 하나 없다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서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 마침내 평소의 마음이었다”라고 하자, 모두가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목과 기와를 옮기고, 인부를 모아서 병인년 봄을 넘겨 묘소 아래에 3칸 집채의 앞쪽에 달아 낸 칸살 집을 지었다. … 손자 박홍이(朴烘以), 박문의(朴門意)가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 그 사실을 기록하고자 부족한 나에 보여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내가 부탁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나, 살펴보니 세대를 이어온 대략의 박씨 가문의 역사기록이었다. 후손이 선조를 기리는 일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게다가 자손들이 선조를 모시는 건물을 지어서 추원보본(追遠報本: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음)의 정성을 다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모름지기 후손들은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아서 선조의 넉넉한 덕을 실추시키지 않고, 종족 간 화목을 잊지 않아서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의 직분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옛 법도도 쇠락하고, 천륜의 법도가 이지러져 풍속이 문란한 작금의 사태에 어찌 더욱 서로가 함께 삼가고 힘쓰지 않겠는가. 이는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일 것이니, 외동읍 북토리에 자리한 석은재는 후손의 애틋한 마음이 서린 정결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올해 가을 어느 날 마석산을 오르기 전에 다시 석은재를 방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