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족암                                              전병석 겨울바람은 허공을 세게 겨누었는데짱돌은 엉뚱하게 사천바다케이블카가 맞았다멍은 여행에 들뜬 우리가 들었다손 빠르게 행선지를 바꾸었다여행 같은 인생에서아직 바꿀 행선지가 있는 것은 축복아직 바꿀 시간이 남아 있는 것도 감사상족암으로 방향을 틀었다바람이 바다 운치를 더한다 같은 바람이라도 이렇게 다르다그러니 인연이란 게 있는 거다촌집 장작처럼 쌓인 암벽 앞파식대에 있는 물웅덩이들이공룡의 발자국이란다내 늙은 상상력으로는 공룡이 걸어가지도 날지도 않는다사진 몇 장 찍고 돌아서는 내게상족암이 공룡 풀빵을 건네며 한 말씀 던진다네 안에 숲, 어린아이가 없어서겠지 동심을 상실한 무지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일갈 여행을 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발랄하고도 유연한 어조로 전달하는 시다. 사건 하나로 시는 얼마나 풍족하고 재밌어지는가? 시는 바람 이야기로 출발한다. “허공을 세게 겨”누었다는 말은 하늘에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여파(“짱돌”)는 애꿎은 사천바다케이블카가 맞았다. 풍향과 풍속 때문에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못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게 케이블카를 타지 못했다는 말을 이번에는 “멍은 여행에 들뜬 우리가 들었다”는 유머로 풀어낸다. 바람과 케이블카와 우리 사이의 연쇄 속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이 상한 인간의 이기적인 자아다. 우리는 재빠르게 고성 해안의 상족암으로 방향을 튼다. 모습이 밥상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암석 공원. 조금 전의 멍든 마음과는 달리 “아직 바꿀 행선지가 있는 것은 축복/아직 바꿀 시간이 남아 있는 것도 감사” 제법 그럴싸한 변명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곳에선 바람이 바다 운치를 더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바람이라도 이렇게 다르다/그러니 인연이란 게 있는 거다”며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우쭐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으로 시작된 화두가 “물웅덩이들”속 공룡 발자국을 발견하는 다음 단계에 이르면 나는 아직 무지와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독자들은 알아차린다. 시인은 “내 늙은 상상력으로는/공룡이 걸어가지도 날지도 않는다”고 공룡 발자국보다 나이 든 늙은이 어투로 속엣말을 하고,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돌아선다. 그때 “상족암이 공룡 풀빵을 건네며”(아마도 상족암에서 공룡 풀빵을 구워 파는 분이 있었으리라.) 넌지시 그에게 한 말씀을 던지신다. “네 안에 숲, 어린아이가 없어서겠지”자연과 동심을 상실해버린 허수아비 같은 인간을 일갈하는 자연의 훈계가 우리에게 제대로 한 방 급소를 먹이는 장면이다. 지금 ‘내 안에는’숲과 어린아이가 있는가? 이제는 각자가 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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