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성암(惺巖) 최세학(崔世鶴,1822~1899)은 사성(司成)공 최예(崔汭)의 후손으로 고조부 최경담(崔慶聃,1692~1759), 증조부 최종섭(崔宗燮), 조부 가암(稼庵) 최수(崔琇)의 가계를 이룬다. 부친은 최원복(崔元復), 모친은 벽진이씨 이옥현(李玉鉉)의 따님으로 최세학은 내남 이조마을에서 태어났다. 남들보다 학문이 더디게 성장하였지만 꾸준함으로 성취하였고, 경전의 법도를 평생 받들고 학자의 본분으로 평생을 산 인물 최세학. 특히 그는 『심경부주(心經附註)』「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서 사양좌(謝良佐)가 “경(敬)은 바로 항상 성성(惺惺)하는 법이다.”라 한데 대해, 주자가 “서암(瑞巖)의 스님은 매일 항상 스스로‘주인옹(主人翁)은 성성한가?”라 묻고는 “성성하다”라 스스로 대답한 이 부분을 좋아해서 자신의 호를 성암, 즉 마음이 혼매(昏昧)하지 않고 밝게 깨어 외물에 이끌리지 않는 ‘성성(惺惺)’의 의미를 쫓았다. 이 역시 마음공부의 ‘지경(持敬)’이다. 이종상이 육영재에서 『심경』을 강의할 때 최세학이 태극서론(太極書論) 그리고 심학도(心學圖)에서 ‘신명(神明)’ 두 글자가 더해진 이유 등에 대해 질문하였고, 이종상은 “질문한 여러 조항 모두 의아하고 난처한 것들로 상고하고 살필 정밀함이 있다. 역학계몽과 황극경세(皇極經世) 같은 책에서 선현께서 이미 발명(發明)함이 극진하여 후학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후학 된 자는 진실로 한번 궁구하여 그 대략을 살펴보아야하고, 만약 이에 마음을 가지런히 아울러 힘써 한 집안의 계책으로 삼는다면 또한 공부를 위한 선후(先後)와 완급(緩急)의 차례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서로 교학상장하였다. 청도에서 생을 마친 외와(畏窩) 최림(崔琳,1779~1841), 청도 만화정 주인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1814~1875) 등과 교유하였고, 경주의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의 문인이었다. 다행히도 퇴계 후손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가 행장을 지어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경주의 학자 최세학은 학문적으로 그리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아니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노둔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사람일 것이다. 노둔함은 사람의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며, 노둔한 재주로 지극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전력을 다하면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에 들어가 반복해서 책을 읽으며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은 채 마침내 독서의 궁구함을 터득한다. 유명한 인물 가운데 대기만성과 만년의 성공을 이룬 자가 더러 있지만, 경주에서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최세학 선생을 꼽고 싶다. 게다가 그를 믿고 기다려준 그의 부모의 역할 역시 귀감이 된다. 1901년 그의 재종질인 최익수(崔翊壽) 등이 성암문집을 편찬하였으며, 경전과 관련된 도표와 저술이 많으니 후학을 위해 기술한 점이 특이점이다. 성암 최 공 행장 - 향산 이만도 학당에 들어갔으나 재주가 노둔하여 열 가지를 가르치면 한 가지도 깨치지 못하고, 백 번을 읽어도 한 번을 외우지 못하였다. 다만 『통사(通史)』는 책을 펴고 말없이 궁구하고 종일토록 공부하였으며, 아이들이 깔보고 업신여겨도 못 본 척하고 온갖 말로 놀려도 못 들은 척하였다. 5~6년을 이같이 하니 지혜로운 생각이 비로소 통하였다. … 하루는 모친에게 “제가 이제 글의 뜻과 읽는 법을 조금 깨쳤습니다”라 하니, 모친이 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장차 네 덕분에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구나”라 하였다. 부친 통정공(通政公) 역시 기특하게 여기고 재주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였고, 공이 밝게 아는 곳이 의리(義理)에 있고, 시문(時文:과거공부)은 잘하는 분야가 아님을 잘 알았으나, 선대(先代)가 거듭 과거에 실패한 일을 염두에 두고 추황대백(抽黃對白)의 대열에 두었다. 또 공부가 안으로 쌓이지 않으면 밖으로 드러날 수 없다고 여겨 산사(山寺)에서 『벽경(壁經):서경』을 읽게 하니, 3년 만에 거의 천독(千讀)에 버금갔다. 이때부터 문리(文理)가 날로 나아가고 구법(句法)이 더욱 뛰어나 보는 사람 가운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나이 40에 비로소 향시에 한번 붙었으나 곧바로 사양하고 떠나 오로지 위기(爲己)의 일에 힘을 기울였다. 『중용』과 『대학』에서 먼저 기본을 세우고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인심(人心) 도심(道心)과 사대절(四大節)을 각각 그 본문에 따라 그림으로 그려 침실에 걸어 두고 항상 바라보았다. 또 성경(誠敬) 두 글자를 요부(要符)로 삼아 하나의 언행과 행동거지에도 감히 소홀함 없이 겸허히 하고, 한 걸음 물러나 한 번 머리 숙이는 것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 세간의 시비를 일찍이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일찍이 송나라 사양좌 성성(惺惺:마음이 항상 맑게 깨어있음)의 설을 좋아하여 스스로 ‘성암(惺巖)’이라 하였다. 학생들이 월산(月山)의 남쪽에 보인재(輔仁齋)를 짓고 시서예악을 각기 때에 맞게 공부하였고, 매번 모일 때 반드시 향음례(鄕飮禮)와 향약례(鄕約禮)를 먼저 행하였다. … 나는[이만도] 공과 같은 세상에 태어나 400리 떨어져 살면서 공의 아름다운 명성에 대해 들었다. 궁핍한 초가집에서 맑게 행실을 닦고 학문을 독실하게 부지런하면서도 장차 늙음이 이르는 줄도 모르고, 쇄연(灑然)히 옛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 공의 사종손(四從孫:10촌)인 최현두(崔鉉斗)가 와서 행장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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