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한씨 둔옹(遁翁) 한여유(韓汝愈,1642~1709)는 증조부 한언호(韓彦浩), 조부 한극경(韓克敬) 그리고 부친은 한준형(韓俊亨), 모친은 월성이씨 이응상(李應祥)의 따님 가운데 외동으로 내남의 두릉에서 태어났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일생 가운데 경주의 학풍과 노론의 형성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발생한다.
노론의 영수(領袖) 송시열이 포항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1679년 4월에 거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경주부를 경유하며 곡산한씨 둔옹(遁翁) 한여유(韓汝愈,1642~1709) 등과 접촉하는 일이 있었다. 1689년 우암 사후에 한시유(韓是愈) 등을 중심으로 경주부에 봉암영당(鳳巖影堂)을 거쳐 노론계 인산서원이 건립되기에 이른다. 당시에 족인 한시유(韓是愈)가 봉암영당의 송시열 영정을 훼손하려는 유생들에 대항하다 장살(杖殺)되기도 하였다.
「연보」에 의하면 “기미년(1679) 선생[韓汝愈] 38세에 유배에 오른 우암 선생을 뵈었다. 이때 송 선생께서는 포항 장기[봉산(蓬山)]로부터 거제로 이배되어 경주를 지나갔다(己未 先生三十八歲 拜尤菴宋先生于嚴程 時宋先生自蓬山移巨濟 路過邑境).”라 기록한다.
2017년 필자의 『계림사화의 배경과 영향 고찰』연구논문을 인용하면,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남인(서인주도)의 정권장악 이후 1674년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우위에 있었고, 이후 서인에 의한 남인의 정치적 탄압이 지속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과 1694년 갑술환국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된다. 이렇듯 숙종년간 지속된 환국으로 붕당체제에서 일당(一黨)체제의 정치판도로 변하고, 이에 대한 영향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안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노론계가 영남의 곳곳에 파고들어 서원을 건립하며 남인들과 공분을 사는 일이 발생하고, 그 가운데 경주지역 역시 영남남인이 노론에 의해 탄압이 일어나면서 1722년 봉암영당 훼철사건이 그 중심선상에 있게 된다.
경주는 1717년 우암을 모시는 서원건립 소장(疏章)을 시작으로 1719년 노론계 경주부윤 이정익(李禎翊)의 도움으로 봉암영당이 건립되고, 1725년 부윤 조명봉(趙鳴鳳)에 힘입어 인산영당(仁山影堂)을 거쳐, 1764년 영당에 목주를 모시고 강당을 증축하고 인산서원이라 명명하였다. … 또한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맞이해 양동의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가 「변신옥소」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미 노론의 미움을 샀고, 더불어 경주 땅에 노론계 서원이 들어서면서 남인과 노론의 대립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한여유는 영천의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1667~1732)과 깊이 교유하였고, 정규양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제자로 퇴계학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우암 송시열의 제자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1629~1714)과도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있듯이 한여유는 노론계 문사와의 교류도 잦았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노론에 의한 남인의 탄압이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정규양 역시 남인 이덕표 등과 교유한 인물로 1725년 계림사화 이전에는 서로 돈독함이 있었다.
사후 1741년에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고, 두릉사(杜陵祠)에 배향되었다. 순조 16년(1816)에 후손 한필제(韓弼悌)‧한문건(韓文健) 등에 의하여 간행된 『둔옹집』은 이현일의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1657~1730)의 「둔옹전」, 정규양의 「題遁翁遺藁後說」, 화계 류의건의 「遁翁傳後敍」 그리고 권말에 있는 남려(南廬) 이정엄(李鼎儼)과 치암 남경희의 조카인 명응(鳴應) 남봉양(南鳳陽)의 발문 등이 수록되어 당시 문사의 학맥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둔옹전(遁翁傳) - 이재 둔옹 한여두는 두릉마을 사람이다. … 3세에 부친을 여의고, 잇달아 조부모 상을 당해 모친과 외롭게 살았다. … 먼저 소학 책을 받아들고 낮밤으로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묵묵히 깊이 사색함을 좋아하였으며, 애들을 따라 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네가 고아로 자랐지만 지금 다행히도 약관의 나이에 문학을 닦으면서 어찌하여 과거계획이 없느냐?”라 하니, 공은 “큰 사람은 명이 있으니 감히 어기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을 따라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을 적는데 잠깐 동안에 글을 이미 완성하였다. 시험지를 제출하는데 갑자기 어떤 자가 곁에서 시험지를 빼앗아 달아났고, 공은 자리에 물러나 오래도록 한탄해하며, 다시 시험지를 작성해 낼 마음조차 없었다. 그의 벗이 “어찌하여 속히 시험지를 다시 작성하지 않고 단지 한탄만 하는가?”라 하니, 공은 “내 재주 없는 몸으로 과거에서 명예를 다투어 얻고 잃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저들이 나의 능함을 잘못 알고 서로 쳐서 없애는데 이르렀으니 그 속임을 당함이 심하다. 이미 나를 속이고 또 남을 속였으니 이에 탄식할 따름이다”라 하니, 듣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더욱 과거에 뜻이 없고 성현의 글에 더욱 전념하였다.
68세에 질병으로 병들었기에 집안사람에게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자손에게는 독서를 권면하고는 기절하였다. 장남 한명신(韓命新)이 손가락을 찢어 입에 피를 흘려보내 소생시키니 안색이 다시 평상시와 같았고, 일어나 『서경(書經)』홍범(洪範) 고종명(考終命)을 읊조리고 마치며 고요히 숨을 거두니 또한 기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