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 티베트 속담이다. 부산성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두고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이 속담에 용기를 얻어 컴퓨터 자판을 마주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된 부산성은 건천읍 서쪽에 있는 부산 즉 주사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3개의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의 외곽은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며, 성 내부에는 평탄한 지형이 있어 방어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에 유리하다. 부산성이 처음 쌓은 시기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삼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장창(長倉)을 짓고 부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663년(문무왕 3)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문호왕 법민’조에 “왕은 즉위 초에 남산에 장창을 설치했다.…… 또한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 3년 만에 마쳤다”는 기록에 의하면 축성연대를 명기하지는 않았으나 문무왕 즉위 초에 쌓았으며, 축성 기간이 3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신라 성곽들이 그 이후에는 폐성이 되었지만, 이 산성만은 조선시대까지 경주 일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지로 지속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편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는 “진평왕 때에 화랑 죽지랑의 낭도가 부산성 창직(倉直)으로 근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부산성은 진평왕 대에 이미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에 개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부산성을 개축한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쳐들어올 경우 명활산성, 남산성, 선도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에 대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에 부산석성(夫山石城)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2,765보 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성곽’조에 “부산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3,600척, 높이가 7척인데,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태이며, 성 내부에 개천 3개소,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와 군창이 있다.”고 하였다. 부산성이 있는 주사산은 주변에 있는 단석산보다 약간 낮지만 경주 주변에서는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성내 면적은 3,305,785㎡ 정도로 추정되는 대규모 산성이다. 성외의 지세는 사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적들이 침입하기 어려운 천험의 지형을 이루고 있지만,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3개의 계곡에서 흐르는 수량이 풍부하여 거주하기에 적합하다. 성벽의 축조수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제 석재로 내외벽을 축조하고 중간에 잡석을 채우는 협축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체성이 대부분이 무너졌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높이 2m 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부분도 있다. 곳에 따라서는 후대에 개축하였거나 수축한 부분도 있다. 부산성에 대하여 1980년 국립경주박물관 박방룡 등에 의에서 약 2개월간 최초로 전면적인 지상부 확인 및 주요부 실측 등 기초조사를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계림문화재연구원(남시진)에서 2011년 3월28일~ 2012년 6월 29일까지 학술 및 실측 조사를 하였다. 이를 통하여 부산성 내의 건물지 및 시설물 등의 위치 조사, 체성 형태에 대한 기초연구 및 비교, 잔존 체성의 실측 및 입지 여건 분석, 학술 연구를 하였으며 약 200쪽 분량의 보고서를 간행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