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삼(羅蔘)은 경주에서 나는 질 좋은 인삼으로, 우리나라 인삼 중에서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을 나삼,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 함경도에서 나는 것을 북삼(北蔘), 집에서 재배하는 것을 가삼(家蔘)이라 하였다. 앞서 신라에서 난 산삼을 나삼이라 불렀고, 아쉽게도 조선후기로 오면서 공납(貢納)과 환곡(還穀)의 폐단 등으로 나삼은 거의 종적을 감춘다.
나삼의 약효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는 문헌이 없지만, 『신농본초경소(神農本草經疏)』에 의하면 “인삼은 오장(五臟)을 보호하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 혼백을 안정시키고, 놀란 것을 멈추게 하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열어 주고, 지혜를 더한다”라며 광범위한 효험에 대해 언급하였다.
신라의 유명한 나삼이 조선에서도 효능이 인정되어 왕실의 고급 약재로 사용되었지만, 실상에서는 공납과 환곡의 폐단이 심하였다. 게다가 통신사가 요구하는 많은 인삼 등으로 부족한 양을 충족하려고 질 낮은 일반 인삼이 나삼을 둔갑해 진상되었는데, 정조 14년(1790) 3월에 부사직 강유(姜游)가 “일본으로 보내던 통신사가 머지않아 출발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인삼이 2백 60근(斤)이나 됩니다”라며 산삼 공납의 폐단을 상소한 적이 있다.
당시 금 한 푼[分]의 가격은 겨우 돈으로 6전(錢)이었는데, 유독 나삼 한 푼의 가격이 4냥(兩), 강삼 한 푼의 가격이 1냥 4전(錢)으로 금옥(金玉) 보배보다도 훨씬 귀하고 비쌌다. 그리고 강유가 1759년에 경주에 갔을 때 나삼 한 돈쭝의 가격이 20냥이였는데 지금은 40냥이라며 치솟은 나삼의 가격을 언급하였다.
영조 9년(1733) 7월에 서명균(徐命均)은 내의원 약재에 대해 아뢰기를 “강원도에서 봉진(封進)하는 인삼이 이전보다 품질이 나빠져서 전 제조 김재로(金在魯)가 전에 화전을 일구는 화경(火耕)을 금지하도록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화경 때문에 인삼이 나는 곳에서 점차 씨가 마르게 되자 강원 감영에서 각 읍으로부터 값을 거두어 인삼 상인에게 내주는데, 백성이 채취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자연히 값이 비싸져서 이런 폐단이 생겼습니다. 어공(御供)의 경우는 오로지 나삼을 거두어 쓰는데, 근래에는 크기가 작고 품질이 열악합니다. 전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말을 들으면 경주의 인삼밭이 폐기되어 인삼 상인들이 관동과 서울에서 사가지고 와서 나삼이라 일컫는다고 하니,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라며 화전으로 인한 나삼의 생산지 축소와 열악한 품질 그리고 인삼밭 폐기로 부족한 수요의 나삼을 다른 지역의 조악한 인삼으로 속여 대체한 일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정조 14년(1790) 4월에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는 “나삼이 극히 귀해지는 폐단 역시 영남 감영의 관속과 독점 상인배가 이권을 독점하고 조종하기 때문이며, 5, 6배의 높은 값을 주고 사서 진상하는 것도 모두 가삼(家蔘)이기 때문에 계속 퇴짜를 맞는다고 합니다”라며 독점 상인과 부정한 관리로 인한 폐단의 실상을 아뢰었다.
정약용은 나삼을 바치는 자가 나삼 한 냥마다 돈 400냥으로 값을 정해서 내의(內醫)의 집에 바치고, 내의는 그 10분의 1로 삼을 무역해서, 자신이 바치고 자신이 받으면서 남은 10분의 9를 먹는 방납(防納)을 지적하였다. 방납은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나라에 대신 바치고 대가로 백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 내던 일을 말하는데 당시 온갖 물품의 공(貢)이 모두 이와 같았으니 백성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영조 42년(1766) 3월 영조에게 병이 있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인 김귀주(金龜柱)는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으로 효과가 좋은 이 나삼을 쓸 것을 주장하고,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洪鳳漢)은 그냥 일반 인삼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영조 48년(1772) 7월 21일에 김귀주와 그의 사촌동생 김관주(金觀柱)가 상소하여 그때의 일을 가지고 홍봉한을 비난하였으나, 영조는 오히려 김관주와 김귀주를 해임하여 일을 문책하고, 이 일을 다시 거론하지 말도록 명한 적이 있었으니 영조의 정치적 현명함과 나삼에 얽힌 비하인드가 재미를 더한다.
결국 나삼은 비용을 들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산을 누비며 손으로 캐야 하는 힘든 노동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 가격이 전보다 10배씩이나 오르고, 장사치의 농간에 가격이 요동치는 상황에 백성의 생활은 더욱 힘들고, 게다가 나삼 씨가 말라 이제는 볼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당시 경주지역 산삼의 주생산지역을 면밀히 연구해 지역 특산물로 활용되길 소망해본다. 산삼의 고장 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