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산은 경주 주위에 있는 어느 산보다 그 명칭이 다양하다. 문헌에는 주사산(朱砂山), 부산(富山), 오봉산(五峰山), 하지산(下地山) 등으로 기록되고 있는가 하면, 지역주민 등으로부터는 닭벼슬산[계관산:鷄冠山], 오로봉산(五老峰山)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사산은 주사암의 설화와 부근의 붉은 모래에서, 부산은 부산성에서, 오봉산은 산봉우리가 5개라는 것으로, 하지산은 김극기의 시에서, 닭벼슬산은 산봉우리의 모양에서 그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1975년부터 3년간 이 산 아래 아화초등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별 생각없이 여러 차례 이 산을 올랐다. 또 이 산은 아이들의 소풍 장소이기도 하여 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주 이 산을 찾았다. 당시에는 이 높은 곳에 사찰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맥석의 웅장한 모습에서 경탄을 했었지만 오봉산성, 주사암 등의 문화재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산은 서면 도계, 건천 신평마을 여근곡, 건천 편백나무 숲, 천포 산성마을, 서면 천촌 등에서 오를 수 있는데 도계와 천촌에서는 차량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계 쪽으로 오르는 길도 위험하지만, 천촌 쪽 길은 경사가 더 심해 매우 위험하다. 재작년에 그동안 오르지 않았던 천촌 쪽에서 승용차로 주사산을 오르면서 혼이 난 적이 있다. 올라갈 때보다는 경사가 급한 길을 내려올 때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오봉산 정상은 주차장에서 주사암으로 향하다가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 얼마 오르지 않으면 큰 바위 위에 정상 표지석이 있다. 해발 고도가 685m이다. 다시 산꼭대기를 내려와 주차장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주사암이다. 이 암자를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할 때는 주암사라 하였다. 해발 685m인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에 큰 바위를 배경으로 절벽에 붙은 듯이 몇 채의 건물이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2007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주사암에는 지금까지 죽어 나간 사람이 없다하여 불사처(不死處)라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내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한 도인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귀신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였다. 이에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니, 단사(丹砂)의 흔적이 바위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옛날이라고 해서 암자마다 이런 이인(異人)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러는 속한(俗漢)이 이인인 듯 행세하던 일도 있었다. 어떤 암주가 공부를 하는데, 시주 노파 한 분이 그 스님을 20년간 양식을 정성껏 대어드렸다. 20년이 다 된 어느 날, 노파는 암주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기의 예쁜 딸을 보내면서 이렇게 일렀다. “네가 가서 그 스님을 꼭 껴안고, ‘스님!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아라.” 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하였더니 그 암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고목이 찬 바위에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 딸은 그대로 어머니께 전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암주의 됨됨이를 알아차리고 토굴로 갔다. “내가 저런 속한에게 20년간 양식을 대었구나!” 그러고는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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