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이런 사랑
박화남
울타리 넘어가다
울타리가 된 등나무
어깨를 뒤틀어서 철조망을 품었다
차갑게 얼어있는 네게
뼈를 심듯 몸을 연다
산등성이 넘어가다
발목 잡힌 나무처럼
그 자리 몸을 굽혀 너를 안아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
멀리 함께 가겠다고
식물에서 발견하는 이타적 ‘존재양식의 사랑’
“울타리 넘어가다/울타리가 된 등나무”라니! 얼마나 이타적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타리가 되어, “어깨를 뒤틀어서 철조망을 품”어 안을 수 있을까. 등나무 줄기와 잎새가 울타리로 쳐 놓은 뾰족한 철조망을 감싸 안는 풍경이 느린 화면처럼 떠오른다. 지금까지 철조망이 맡았던 다른 생물에 대한 울타리 역할을 등나무가 맡는다. 더 정확히는 이제 등나무가 철조망을 위한 울타리가 되는 경이를 우리는 본다. 이 나무는 만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기적으로 웅크리고만 있는 인간들과는 얼마나 다른가. 이렇듯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비인간’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차갑게 얼어있는 네게/뼈를 심듯 몸을 연다”는 구절은 등나무의 이야기이면서 시적 화자 ‘나’로 넘어가는 서술이기도 하다. 이런 연결이 이 시를 더욱 매력적이게 한다. 왜냐하면 “산등성이 넘어가다/발목 잡힌 나무”를 등나무로만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나온 등나무는 이런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에 그 행동의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굳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 철조망의 입장에서는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어깨를 뒤틀어서” 품은 등나무에서 받은 이타는 시적 화자 ‘나’를 변화시킨다.
냉담하기만 한 ‘너’에게(“차갑게 얼어있는 네게”) “뼈를 심듯 몸을” 열고, “그 자리(에) 몸을 굽혀 너를 안아들” 수 있게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사랑의 양식을 소유양식(having mode)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존재양식(being mode)의 사랑이라고 했지만, 이 사랑은 판단이나 이성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않을 때 나온다. 생산적인 능동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사랑은 자신은 돌아보지 않기에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멀리 함께 가겠다고”, 스스로의 위치를 망각한 상태에서조차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에서 발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넘어서는 자발적인 사랑과, 이를 자신의 호흡과 어법으로 육화한 박화남 시인의 눈길은 생명 일반은 물론 생물의 종류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목을 ‘가령 이런 사랑’이라고 하여 아주 가볍게 어깨 힘 빼고 제목을 잡는 그 점이 그의 시의 중요한 강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