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성(滿月城)은 신라 때 성곽으로 『삼국사기』에 신월성(新月城)의 북쪽, 『동경잡기』에 월성의 북쪽이라고 전한다.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지만, 통일정비공장에서 고려 현종 때 축조된 남고루(南古壘)를 북쪽으로 따라가다 우측의 성동리전랑지(城東里殿廊址) 일대로 추정할 따름이다. 전랑지는 1937년 북천 제방 공사를 하던 중에 통일 신라 시대 큰 건물인 전당(殿堂), 장랑(長廊) 및 담장 및 우물터 등이 발견되어 궁궐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만월성은 월성의 북쪽에 있고,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9백 45척이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주위가 1천 8백 38보로 기록의 차이가 있다. 한자어 ‘滿月’은 온전히 둥근 달을 말하며, 성곽의 표면이 둥근 보름달처럼 둥글기에 ‘만월성’이라 하였을 것이고, ‘반월’과 ‘만월’은 서로 마주해 성이 되어 신라의 안위를 지켰다. 즉 월성과 만월성 그리고 금성은 솥의 다리 세 다리처럼 존립하며 성안에는 각각 웅장하고 수려한 궁궐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지행록(地行錄)」에서 “신라 때 국도(國都)에 쌓은 성은 다섯인데 금성, 월성, 만월성, 명활성, 남산성으로 두루 옛터를 방문하였다. 월성은 산세가 반달과 같아서 이름 지어졌고, 가장 분명히 알만하다. 만월성은 (월성) 북쪽에 있고 월성에 이어서 둥글게 쌓았기에 이름 지어졌다”라며 금성과 만월성을 각기 다른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似因連月城圓築’이라 표현하였는데, ‘連’은 연결 또는 이어지다, 잇다 등의 의미가 부여된다. 즉 월성과 연결하여, 월성에 이어서 등으로도 표현이 가능하니 아마도 그의 말이 맞다면 만월성은 월성의 북쪽에 위치하며 월성과 연결되도록 둥근 형태의 성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 거리상으로 월성과 만월성은 가까운 거리이면서도 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남과 북에 위치한다. 신라의 유적지 만월성에 대해 조선 문인들은 만월성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점필재 김종직은 1486년에 경주부윤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1438~1504)을 전송하며 지은 「送洪府尹 兼善」시에서 “선도산 아래엔 아이들이 죽마를 타고, 만월성 위에는 이슬이 오동나무에 떨어지네(仙桃山下兒騎竹 滿月城頭露隕桐)” 그리고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경주부윤 상정(橡亭) 황필(黃㻶,1464~1526)에게 부친 「寄慶州府尹黃公㻶二律」시에서 “만월성 가에 가을이 다시 돌아오고, 선도산 아래 물은 이끼처럼 푸르다(滿月城邊秋正回 仙桃山下水如苔)”라며 서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만월성과 서쪽의 선도산을 대비하며 높고 우뚝한 상징적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동사강목』을 보면 “신축년 신라 파사왕 22년 가을 7월에 계림이 월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 … 신라는 바닷가에 있어 구적(冦賊)의 경보가 자주 있었으므로 동쪽에는 명활성, 남쪽에는 남산성, 북쪽에는 만월성을 쌓아 서로 의지하는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었다”라며 적을 막는 성의 역할을 언급하였는데, 기각은 달아나는 사슴의 뒷다리를 잡고 뿔을 잡는 것처럼 앞뒤에서 적을 협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1722~1788)은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서 “그렇다면 이곳은 금성의 옛터이니, 저것이 반월성이라면 그 북쪽 토산[토부(土阜)]에 둥글게 휘어진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만월성(滿月城)입니다. 곧장 서쪽으로 수풀에 나무가 울창한 것은 진실로 계림입니다”라며 둥글게 휘어진 성곽의 모습을 설명하였다. 경주처럼 시대별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한 곳이 드물다. 신라의 천년고도 동도(東都)는 앞서 삼한의 진한(辰韓) 땅이었고, 사로국이 발전한 신라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이후 불교가 흥행한 470여년간 고려의 땅이었고, 유학을 숭상한 조선왕조 500년의 땅이기도 하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유적지의 존재유무가 중요하듯 그러한 문화가 정착된 이전의 역사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경주는 아직도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문화가 공존하는 역사의 도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