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의 칼리슈테에서 태어났다. 칼리슈테는 오늘날 체코의 땅이어서 말러는 보통 체코 음악가로 분류된다. 평생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고 싶은 작곡보다는 생계를 위해 지휘를 더 많이 해야 했다. 살아생전 그는 완벽주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만든 탁월한 작품들은 사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평가를 받게 된다. 말러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모두 정신병을 앓았다. 말러의 열다섯 형제자매 중 여덟 명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남동생 오토는 22살 때 권총으로 자살했다. 가족의 잇단 죽음은 말러에게 강한 죄의식을 남겼고, 이후 그의 음악은 죽음과 죄의식에 경도되었다. 말러의 첫 작품 칸타타 ‘탄식의 노래(Das klagende Lied)’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탄식의 노래는 빈(Wien)대학 시절의 작품으로 1878년에 시작하여 1880년(20살)에 완성했다. 말러는 이 작품을 이듬해 베토벤 상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입상하지 못했다. 심사위원 대부분이 브람스를 비롯한 보수파였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대학시절 브루크너에게 대위법을 배웠고, 브루크너는 잘 알려진 대로 바그너 추종자다. 브루크너와 상극관계에 있던 브람스가 브루크너의 제자에게 좋은 점수를 줄 리 없다. 그렇다고 말러가 진보파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말러는 유대인이었고, 바그너는 그런 유대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러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충돌했던 19세기 유럽음악의 주변인이었다. 작곡가 말러의 생애 첫 작품이 입상에 실패하자 그는 크게 실망했다. 말러는 이 입상 실패가 훗날 작곡가가 아닌 지휘자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로 말러는 이후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그리고 찾는 사람이 많은 성공적인 지휘자가 되었다. 말러는 오로지 시즌이 끝나고 주어지는 짧은 여름휴가 중에만 작곡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교향곡 1번(거인)과 2번(부활), 그리고 그의 교향곡에 큰 영향을 미친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n)’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그의 교향곡은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지휘자로 유럽의 극장들을 전전하던 말러에게 드디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897년 빈 국립오페라극장(빈 슈타츠 오퍼, Wienstaatsoper)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엔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음악감독으로 기용될 수 없었다. 이때 유대인이었던 말러는 과감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리고 37살에 유럽 최고의 극장 중 하나에서 영광스런 커리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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