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훈(月暈)
박용래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 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렘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겨울 귀뚜라미 울음으로 표상된 노인의 적막
『문학사상』 1976년 3월호에 발표된 시다.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작은 오두막에서 기인 밤 홀로 잠이 깨어 무와 고구마를 깎는 노인의 고독한 내면을 생각한다. 외로운 노인은 토방에 앉아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렘”을 귀를 모으고 듣기도 하고,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숨 죽이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때 노인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을 겨울 귀뚜라미가, 벽 속에서 벽이 무너지라고 운다. 그 노인의 적막감이 더욱 고조되는 건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달무리.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겨울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인간의 내면적 고독과 절망을 어떻게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는지, 그런 심사가 “꼴깍, 해가, 노루 꼬리 해가 지면”,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같이 촘촘히 박힌 조심스런 언어의 배치와 변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이 시의 배경도 아마 세모쯤이 아니었을까? 70년대엔 외딴집에서 홀로 잠이 깨어 뒤척이는 이런 노인이 많았을 것이다. 그 노인들에게도 자식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찾지 않아서 그 분들의 속은 무너졌을 뿐. 그래서 그들은 외톨이 겨울 귀뚜라미로 벽이 무너지라고 울었을 뿐이다.
반세기를 지난 요즘이라고 그 사정이 달라졌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유모차를 밀고 하나 둘, 마을 회관에 모여 하루 종일 화투를 치며 소일하다가 이슥하면 돌아가는. 끄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방안에서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나는 그분들의 외로움을 생각한다.
도시 변두리에선 굽은 허리로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어, 밀차를 밀고 위태롭게 인도를 건너가는 그분들을 하루가 멀다고 만난다. 하나같이 고독하고 쓸쓸한 표정의 눈빛들이다.
외로운 사람은 온몸으로 사람의 자취를 기다린다.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 형태가 되었다고 하지만, 새벽부터 깨어나 유모차를 미는 굽은 허리, 벤치에서 따스한 빛을 쬐며 으스스한 황혼을 건너가는 그분들이 우리네 부모들 아닌가?
일찍이 목월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시인 박용래, 목월을 만날 때마다 소주를 마시고 훌쩍훌쩍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는 천래의 서정시인, 잘 다니는 한국은행을 나와 집에서 하루 종일 시만 썼다는, 가장 시인다운 삶을 산 시인의 시를 세모에 읽으며 이래저래 깊은 감회에 사로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