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여신을 상징한 그리스 아테네]
그리스는 유럽대륙이 지중해로 돌출한 발칸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유고, 불가리아 및 터어키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동쪽은 에게해, 서쪽은 이오니아해, 그리고, 남쪽은 지중해와 이어져 있다. 한반도의 절반 면적에 인구 1천100만명이다.
그들은 터키 지배 당시 불렸던 그리스보다는 헬라스(HELLAS)라 불리길 좋아 한다.
유럽인들은 그리스를 두고 찬란한 고대문명은 다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은 ‘유럽의 고아’라고 일컫는다. 이에 그들은“그래! 우리는 가난한 어머니의 나라다”라고 자위한단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이기도한 그야말로 유럽문화의 모태이다. 자유의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이미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나라, 평화와 자유를 목적으로 개최된 올림픽의 발상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찬란했던 고대문명이 흥망성쇠의 자연이치에 따라 서서히 소멸해 지금은 역사의 뒤편에 밀려나 있는지도 모른다.
반도국가, 3면이 바다, 위도상의 위치 등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나라다.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월드컵으로 확고한 자리 매김을 했다니 역시 월드컵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테네는 교통체증 때문에 홀 짝 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홀수번호와 짝수번호 두 대의 차를 번갈아 운행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아테네도 고도제한이 있다. 6층 이하 건물만 허용된다고 한다.
[작지만 큰 인간주의의 표상 아크로폴리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중심지에 높은 언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폴리스라고 불렀다. 나중에 도시국가를 폴리스로 불리면서 이 언덕은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여 아크로폴리스로 불렸다. 높은 도시라는 뜻이다.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165m에 정상부에는 동서 300m, 남북 160m정도의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아테네여신, 나이키, 에릭시온 등 수호신을 모신 여러 신전이 세워진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서쪽에 나 있는 정문을 제외한 다른 곳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 지형적인 특성을 이용, 여기에 다시 성벽을 쌓고 방비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금 높은 경주 월성을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아테네여신이 시민들에게 선물했다는 전설과 함께 國木으로 지정되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올리브나무가 심어져있었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다보면 중턱에는 아티쿠스왕이 부인 레길라를 위해 지었다는 야외음악당 오데이온(Odeion)이 있다. 지난 72년에 복원, 5천석의 관람석을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배치한 형식이었으며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고 있단다. 총 3층이었는데 지금은 1층까지만 복원되어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정문을 들어서다가 대리석 돌계단 틈에 피어있는 노란 민들레를 만났다. 봄이면 경주에서 흔하게 보던 민들레가 여기에도 피어있으니 새삼 반가웠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지금은 복원을 위해 해체된 상태인 승리의 신 나이키를 위한 신전이 있고 중앙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파르테논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파르테논신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6명의 여사제가 머리로 받친 에렉시온신전신전, 뒤쪽에는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 터가 있고 그 옆에는 박물관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테네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저만치에는 그리스 최대로 알려진 제우스신전이 열다섯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앙상하게 남긴 채 허허로운 모습으로 쓸쓸하게 서 있다. 남쪽 기슭에는 1만5천석을 자랑하는 디오니소스의 원형극장이 보인다. 그 옆에는 올라오다 만난 야외음악당이 한눈에 든다. 이곳이 종교는 물론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쪽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재판하던 곳이었던 아레오바고 언덕, 그 너머에는 저자(시장)였던 아고라가 보인다. 아고라는 시장기능뿐 아니라 도서관, 의사당, 국정청, 군무청, 재판소 등의 공공건물이 있던 곳으로 아고라조(모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뜻이란다. 당시에는 가장 번화했던 지역이었겠지만 지금은 낡은 석조건축물만 조용히 앉아 세월을 지킬 뿐 인걸은 간데없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상승효과와 파르테논신전]
이 도시 이름이기도한 아테네는 많은 신들 가운데 유일한 처녀신으로 파르테논신전은 ‘처녀아테네여신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1호로써 BC447-432년에 걸쳐 15년간 지어진 석조건물이다. 가로 8개, 세로 17개의 기둥의 안에 내벽이 있고 그 안에 아테네여신의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기둥을 하나의 돌로 다듬은 게 아니라 지진방지책으로 토막토막을 포개어가는 방식으로 세웠다. 따라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둥은 배가 부른 앤타시스식 즉 배흘림기둥방식이었다. 기둥의 굵기와 크기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지 않고 가운데로 6%정도 기울어지게 세웠다고 한다. 모든 기둥을 연장하면 하나의 꼭지점에서 만나도록 설계되었으며 가로세로가 황금비율로 된 특이한 방식이었다. 멀리서 이 신전을 바라볼 많은 시민들의 시각을 고려해 설계를 했다는 것은 자유민주정신에 바탕한 철학적 사고를 했던 이곳 헬라인들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산 아래에서 바라볼 때 산 전체가 탑으로 승화되는 느낌을 주는 경주남산 용장사 삼층석탑과 그 착안이 아주 흡사하다.
기단부는 붉은 대리석 암반이었다. 붉은 대리석 암반위에 우유빛 대리석으로 건물을 지었다. 신전을 오르는 계단을 붉은 대리석 암반의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한 점이 돋보였다.
이 신전은 2천500년의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신전 외에도 술탄의 궁전, 교회, 성당, 종탑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17세기까지 지붕을 포함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난 1687년 9월 26일 베네치아군의 함포에 맞아 보관 중이던 화약이 폭발함으로써 지붕과 내부시설, 일부기둥 등이 날아 가버렸다. 소중한 유적이라 폭격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터키군이 무기고로 사용했던 것이다.
4년마다 아테네여신에게 제사 지낼 때는 건물전체를 아름답게 채색했었다고 한다. 신전의 박공과 벽면에 부조되어 있던 동물, 인물 등이 아름답게 채색된 파르테논신전을 한번 상상해 보라!
[2천500년전의 라스베가스 고대 고린도]
사도바울의 고린도전서와 고린도운하로 일반에 잘 알려진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고린도로 달리는 차창에는 오후 햇살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에게해의 아름다운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길목으로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춘 고린도는 육로뿐 만아니라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항과 에게해의 겐그레아항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따라서 많은 전쟁을 겪어야했던 격전장이기도 했던 고린도는 BC 6세기경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했던 상업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며 오늘날 라스베가스에 비견되는 향락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폴론 신전이 있으며 이솝우화의 이솝과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이곳 출신이다. 디오게네스가 “나를 도와주면 내 땅의 반을 주겠다”는 알렉산더대왕에게 “대왕이시여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가리고 있는 햇볕”이라고 말했던 곳도 여기다.
지금의 고린도는 시골마을의 버려진 폐가처럼 그 명성에 비해 아주 초라한 고대유적지에 불과했다. 1858년과 1928년 두 차례의 대지진과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은 7km 떨어진 곳에 신 고린도가 건설됨으로써 폐허가 더 가속화되었으리라....
그 유명한 아폴론신전은 일곱개의 도리아식 기둥만이 옛 명성을 전하고 있었고 사도 바울이 재판 받던 비마터와 원반경기를 보다가 잘못 날아온 원반에 맞아 죽은 아들을 슬퍼하다가 샘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울음소리처럼 슬프게 흐르는 피레네 샘이 있었다. 60만명의 식수였으며 지금도 시간당 1천100리터가 솟아나 고린도 시민들을 먹이는 지하 샘이다. 직경 1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돌을 깔아 만든 넓은 계단과 옛길이 수구와 함께 남아 있어 화려했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 옆에 흐르는 물을 이용해 만든 공중화장실이 있다.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면 제법 편안한 느낌이 드는 대리석에 구멍을 뚫어 만든 변기들이 재미있다.
이곳의 작은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그리스, 로마, 비잔틴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박물관의 좁은 마당에 진열된 목과 손목이 없는 석상들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의 석상들은 머리와 손은 별도로 만들어 끼우는 형식이었는데 머리와 손들을 잃은 석상들이지만 그 자태만큼은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오니아와 에게를 잇는 세계최초의 고린도운하]
이오니아해의 코린시아코스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잇는 길이6천343m, 폭 24m, 깊이 약 90m의 암반을 파내려가 만든 세계최초의 운하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죄수들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실패. 700년 전(1321)에 유태인들을 동원해 일일이 삽으로 파서 만들었고 1893년 프랑스의 민간회사가 오늘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운하가 만들어짐으로써 바닷길이 약 240km를 단축하는 효과를 가져와 그리스에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2만톤 이하만 운항이 가능하다. 운하를 가로질러 놓은 철교위에서 운하를 내려다보면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부분은 24m지만 윗부분은 약 100m에 가까운 단단한 암반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삽과 곡괭이 등 단순한 도구만으로 힘겹게 팠을 저 운하, 그 곳을 통해 불어오는 에게해의 바람은 그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그럽기만 했다.
헬라인들의 신화와 철학, 자유, 토론, 민주주의가 꽃피었던 고대 희랍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에 머문 하루, 아크로폴리스와 고린도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낡고 허물어진 조촐한 고대유물들에서 ‘유럽의 어머니’라는 말과 동시에 빈껍데기만 남은 ‘유럽의 고아’라는 말이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