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國寺 日誌
96년 여름, 영국의 처칠 수상이 태어난 곳이면서 8대조 밀보로 공작이 블랜히임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하사 받았다는 블랜하임 궁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집안의 외손녀가 나와 그 궁전의 역사와 집안에 담긴 일화들을 설명해 주었다. 수려한 외모와 품격이 점치는 말씨와 행동, 자기 집안에 대한 자긍심이 나를 매혹시켰다. 영국하면 그 여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직장동료들과 한달에 한번 고적 답사모임을 시작하면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우리 것에 대한 진가를 알면서부터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을까? 나는 올해 중국어로 불국사를 안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항상 내 자신에게 물었던 것은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으며, 과연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작은 보탬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2월, 첫 출근한 날은 자함ㄴ에서 청운교 아래로, 눈송이가 마치 엷은 꽃잎처럼 날려 오는 날이었다. 매화향기가 천왕문 앞 계단 아래로 산들산들 풍겨오고, 대나무의 푸르름과 산수유의 노란빛이 그림처럼 어울리며 온 동네 꽃잔치하던 사월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깊은 겨울로 접어들었다. 매일아침 토함산 맑은 물로 차 한 잔을 우려 그 따스함을 목으로 넘기며, 화강암 축대의 아름다움과 푸근함을 느끼며 나의 하루를 시작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객은 러시아에서 온 과학자 부부였는데, 물론 언어가 안되니 동행한 고려인이 통역을 하였다. 러시아 말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구 없었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고 “아! 지금 통역이 제대로 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었지만 불교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고, 불국사와 우리의 요구한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진실로 우리 것을 존경해 주는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기쁨으로 흥분되었고 신바람이 나서 더욱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안내가 끝나고 진심에서 우러난 그들의 인사에 그날은 장말 기분이 좋았다. 고려인도 막연했던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맥을 잡게 되었다면서 무척 고마워했기에 더욱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무척 언짢았던 날도 있었다. 하계 Univresiade대회 기간 중 중국의 방송국기자단이 취재차 왔는데, 마침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들어왔다. 조용하던 경내는 연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인솔교사와 고함을 치며 뛰어다니는 학생들로 마치 학교의 운동장처럼 되어버렸다. 안내하는 나의 목소리가 소음 속에 묻혀버리니 그들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순간 내 얼굴이 화근 달아올랐다. 기어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불교의 성지이며 우리가 아끼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산이니 당연히 정숙하고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하지 않겠느냐고. 그제야 깨달았는지 인솔자는 학생들을 불러 모아 열을 맞추고 주의를 주었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은 아주 조용히 관람하기에 좌불안석일 때가 종종 있었다.
9월 12일 밤은 태풍 ‘매미’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불국사가 다치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출근하니 군데군데 나무들이 찢기고 넘어지고 기와들이 떨어져나갔지만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백운교 앞의 나무들이 굳건히 서 있어서 기뻤다.
단풍이 한창일 때 독일의 아카펠라 합창단 27명이 공연을 끝내고 들렀는데, 인솔자의 영어가 아직은 서툴렀고 전문 불교 용어를 몰라 통역에 애를 먹었다. 나도 영어가 서툴렀지만 석가탑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안내한 내용 중 가장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은 내 눈을 내려다보며 어찌나 열심히 듣던지 입술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그들은 무려 2시간 반 동안이나 머무르며 감상할 만큼 불국사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안내가 끝난 후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찬사를 보내고는 갑자기 나를 에워싸더니 내게 감사의 노래를 하겠다며 ‘보리수’ 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시간에 배웠던 노래를 같이 불렀다. 물론 기분 좋은 하루였다.
주지스님이하 늘 챙겨주시는 사무실 직원들, 수행에 정진하시는 강원과 선원의 스님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이른 시간부터 묵묵히 맡은 소임에 성실한 보살님들과 처사님들, 음식솜씨 훌륭한 공양주님들, 일 년간 내 짝지로 근무한 사랑스런 김 양, 모두 건강하시고 성불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어 통역 안내원 이승옥 (경주시 충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