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全鰒)은 복어(鰒魚)·구공라(九孔螺) 등으로 불리며 최상급 해산물로 분류되어 임금에게 진상하는 귀중한 공물이었고, 껍데기 담갔던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진다며 석결명(石決明)으로 불린다. 귀한 전복은 한양으로 보내질 만큼 그 가치가 높아졌고, 그로 인해 지방의 전복 채취와 공물을 위한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1390~1460)은 제주 안무사(按撫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채취에 매우 괴로워하자 자신은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고, 정조년간 울산 병영의 군사들이 부산 기장으로 넘어와 무단으로 전복을 채취한 일을 금하고 방비한 전복월경채취금령불망비(全鰒越境採取禁令不忘碑) 등이 이 일을 뒷받침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복ㆍ연어ㆍ넙치ㆍ은어ㆍ대구ㆍ홍합ㆍ청어ㆍ방어ㆍ황어ㆍ홍어ㆍ김·미역·농어ㆍ문어ㆍ송어 등이 경주부의 토산물로 언급되며, 지금도 감포항 일대의 전복은 최상급으로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1580년 5월 19일. 가랑비가 아직도 뿌리고 구름이 어제와 같이 어두웠다. 또 소봉래로 가는 길이 막혀 우리 두 사람은 이부자리에서 급히 아침밥을 먹고 도롱이를 걸치고 감포로 향하였다. … 미시(未時:오후1~3시)에 우진(右鎭)에 이르니 진장(鎭將) 정군응(鄭君應) 시중(時仲)이 우리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헌(軒)에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 함께 배에 올라 바다 어귀에서 몇 리쯤 들어가서 해척(海尺:어부)을 불러 전복을 찾았다. 그 사람은 발가벗은 몸으로 물에 뛰어들었고, 선회하는 물살과 함께 들어가 물결을 차고 수영을 하면서 번갈아 물속을 들어갔다 나오며 백여 개를 잡았다. 회로 먹고 구워 먹기도 하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다”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1664~1745)는 1704년 가을에 『수승록(搜勝錄)』에서 “바다 가운데 기이한 바위가 솟아올라 흰 돌이 선명하니, 세속에 전하길 ‘대왕암’이라 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기에 촌사(村舍)에 들어가서 묵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생선을 익혀서 반찬으로 내어놓았다. 다음날 … 사공을 불러서 술을 들고 함께 배에 올랐다. 중간쯤에서 돛을 달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마시니, 마음은 가벼워져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또 잠수 잘하는 몇 사람들을 골라 함께 배에 탔다. 물속에 들어가 전복을 따게 하니, 앞장서서 물에 들어가는 모습이 가벼운 물오리와도 같았고, 박[부표]에 의지해서 숨을 쉴 때는 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대왕암 곁에 배를 대고 모가 난 바위에 기어올라 잠깐 배회하였다. 층층으로 모가 나 위험하여 실족할까 두려웠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는 1857년 늦봄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4월 27일 저녁에 동해창(東海倉)에 도착하였다. 만파정(萬波亭) 앞은 끝없이 넓은 바다가 가까이 있고, 바닷물은 바람도 없이 절로 물결쳤다. 파도는 그치지 않고, 잔잔한 바람이 겨우 스쳤다. 물이 솟구쳐 뒤집히고, 벼랑에 서로 세게 부딪혔으며, 서해와 비교해 갑절이나 위험하다고 느꼈다. … 다음날 어부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게 하고, 나가서 그 광경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배에 타고 바다에서 그물을 펼치고는 큰 새끼줄을 양쪽 언덕 끝에 연결하고, 언덕 위의 여러 사람이 함께 힘써 끌어당겼다.  그물이 물가에 이르자 물고기가 팔딱 튀어 나왔으니, 또한 하나의 볼거리였다. 또 전복을 채취하는 자는 긴 밧줄 한 두(頭)로 가볍고 물에 뜨는 나무껍질 몇 줌을 묶고, 나머지 밧줄을 길게 풀어 놓고 벌거벗은 몸의 허리에 묶었다. 작은 칼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 전복을 따내고는, 물에 떠 올라 묶은 나무껍질에 의지해 가슴에 걸치고 휴식하다가 또 물에 들어가 전복을 채취하는데, 매우 위태롭고 두려워 보였다. 이상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경주 감포를 유람하며 고기잡이와 전복을 채취하는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글이다. 지금이야 다이빙 장비가 발달해 안전하게 물질을 할 수가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엉성한 생명줄과 부력이 약한 나무껍질 등에 의지해 억지 숨을 참고 숨비소리를 내며 귀중한 전복을 땄다. 사람이 생계를 도모하는 그 방식에 어떠한 한계가 있겠는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삶을 연명하였으니, 어찌하여 사람들이 전복 채취를 생계로 삼았겠는가? 지금도 감포의 해녀는 생계를 위해 물질을 놓지 못하고 있으니, 예나지금이나 세상이 이익을 좋아하고, 영화를 탐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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