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주변 담벼락엔 어김없이 담쟁이, 길가의 보리수가 노랗게 물들고 있어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이맘때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벼농사를 짓는 한·중·일에만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지난주 루간보이(Luganboy)라는 조그마한 농촌 마을에 예배 갔다가 양철지붕으로 된 작은 교회 앞의 각양각색 허수아비들을 보고 이곳에도 추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농사와 관련된 영미 격언 중 ‘Making hay while the sun shine’라는 표현이 있다. 해석하면 ‘햇살 비칠 때 건초를 만들라’는 것이다. 며칠 전 슬라이고 시내 서점에서 건초더미를 쌓고 있는 농부의 사진과 함께 상기 제목의 기사가 잡지(Ireland’s Own) 1면을 장식한 것을 보았다. 그 칼럼에서 편집자는 한마디로 “농촌의 여름철 작업은 어머니와 같은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견된다”고 글을 시작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6월 말부터 7월 초, 뜸부기(Corncrake)의 길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판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면 건초 베기가 시작된다. 이른 아침 종달새 울음은 농부들의 늦잠을 깨우고 제비와 비둘기, 찌르레기는 하늘 높이 난다. 농부들은 목이 긴 낫자루를 활용해 여름 내내 웃자란 풀을 잘라 둔다. 갈고리로 밭고랑을 만들어 줄지어 3~4일 동안 풀들을 뒤적여 주면서 충분히 말린다. 흩어진 건초를 우선 한 사람이 들 수 있을 정도의 더미를 만들고 이것들을 더 큰 건초더미로 옮겨 쌓는다. 둥글고 높은 건초더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갈고리를 활용해 시계방향으로 빗어 둥그스름하고 단정한 건초더미를 만든다. 한 달포 정도 들판에 쌓아둔 뒤 이맘때쯤 집으로 가져와 창고에 저장하면 건초가 완성된다. 급조된 건초는 온도가 상승하고 영양이 떨어진다고 하니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다. 지금은 트랙터를 이용해 건초를 잘라 1톤 이상의 검은색 포대에 넣어 발효와 보관을 쉽게 하기 때문에 요즘은 위의 전통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불어 땀의 소중함도 온가족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맛있게 먹던 점심의 추억들도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힘들여 일하지 않으니 말들은 마력(Horse Power)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더 이상 푸른 초장 위, 엥콜이나 커튼콜은 사라졌다”며 농촌의 전통과 추억이 사라진 데 대해 아쉬워하며 글을 맺었다. 기사를 다 읽고 나니, 농부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오버 랩 되는 부분이 많았다. 늦봄 뒷산에 소쩍새 울 때면 아버지와 형님들은 들판에 나가 쇠풀을 낫으로 베 와서 잘게 썰어 마당에 널어놓았고 갈고리로 뒤적일 때마다 상큼한 풀냄새가 좋았었다. 마당에 널어 잘 말린 건초는 볏짚과 섞어 겨우내 소에게 먹일 여물로 사용했다. 새참에 관련된 추억은 내겐 좀 특별하다. 4형제 중 막내인 필자는 아무래도 형님들보다 힘과 경험에 밀리다 보니 농번기가 되면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1970년대 중반 어느 초여름 광명들 논에 모심기하던 날, 이날도 예외가 아니어서 의기소침해 집으로 돌아온 필자는 힘들게 일하시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새참을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가마솥에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땔감으로 보릿단을 사용하다 보니 눈물만 나고 열이 쉽게 가해지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노릇노릇 감자를 삶아 찬합에 담아 들로 가져갔다. 저만치 우리 논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끄러운 논두렁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만 중간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어렵게 가져간 새참을 논두렁에 버릴 수 없어 내 몸은 진흙투성이가 될망정 감자만큼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새참을 먹게 된 가족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고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어머니는 ‘막내’가 너무도 대견하셨던지 빨래터에서 동네 아낙들에게 그 일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나 보다. 이후 동네 아낙들이 필자만 보면 ‘내게도 맛난 감자 좀 삶아 주라’며 놀려대기 시작해 한동안 동네 아낙들의 눈길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이제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어릴 적 추억만 남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만난 허수아비들, 전통적인 건초 만들기 기사를 접하고 잠시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호사를 맛볼 수 있었다. 이 가을 ‘경주신문’ 독자분들 중 형편이 되신다면 경남 하동의 평산리(박경리 소설 ‘토지’의 주무대)에 열리는 ‘마을 허수아비 축제’를 다녀오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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