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기 황룡사를 봐, 번(幡)이 높이 올랐어! 백고좌가 열리나 봐!”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 신라 왕경의 황룡사 하늘에 높이 매달려 펄럭이는 번을 보고 외쳤을 법한 신라인의 목소리다. 절에서 법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 당간지주(幢竿支柱) 가운데에 당간을 높게 세운 후 번이나 깃발을 내걸었다. 오늘날의 홍보 현수막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요즈음은 지역의 주요 교차로나 눈길이 잘 가는 곳에 현수막 지정 게시대가 자리해 온갖 홍보물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정 게시대 밖에 무분별하게 정당 현수막이 나붙어 꼴불견이다. 더구나 자극적인 정치적 문구는 짜증을 불러일으켜 찜통더위를 더욱 불쾌하게 하고 있다. 현수막(懸垂幕)은 지방자치단체나 관공서, 정당, 시민단체, 학원, 상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홍보용으로 거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현수막의 한자 ‘수(垂)’자가 ‘드리우다’의 뜻이므로 사찰에 걸었던 번처럼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천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배너(Banner)이다. 이는 한자문화권의 글쓰기가 세로쓰기였던 데서 유래한 면도 있다. 가로로 된 것은 횡단막(橫斷幕)이라 불러야 하고 국어사전에도 별도로 실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가로세로 구분 없이 통틀어 그냥 현수막이라 부르고 있다. 가로등에 세로로 늘어뜨려 매다는 것을 현수막(배너)이라 불러야 하기에 앞으로 횡단막이라 구분하는 것이 옳다. 경주시에는 128개소의 현수막 지정 게시대가 있으며, 행정용 현수막 게시대는 56개소 182면, 상업용 게시대는 72개소 500면이 있다. 상업용은 통상 7일을 게시기준으로 신청 접수를 받아 추첨을 통해 정해진 비용을 부담하고 게시하는데, 월간 2000장을 걸 수 있다. 이들은 ‘경상북도옥외광고협회 경주시지부’가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반면 읍·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자체 관리하는 현수막 게시대도 74개소 124면이 있다. 이들은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 경상북도 옥외광고물 조례(약칭), 경주시 옥외광고물 등 관리조례에 의해 잘 관리·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선거철도 아닌데 어느 순간 정당 현수막이 지정 게시대 밖의 명당자리에 시도 때도 없이 난립하고 있다. 문구도 정치구호 일색이거나 상대 당 헐뜯기, 자화자찬, 심지어는 자기 사진까지 크게 실어 선거철인 마냥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야말로 원색 비방이 난무해 정치 혐오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길거리 정당 현수막이 갑자기 많아진 이유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더불어민주당의 김민철, 서영교, 김남국 국회의원이 시차를 두며 발의하고 모든 정당이 이 정책을 반겨 2022년 6월 무려 90% 찬성으로 신고 및 금지·제한 적용을 배제하고 표시방법 및 기간을 시행령에 위임하는 내용으로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같은 법 시행령이 2022년 12월 10일자로 개정되면서 소위 ‘무제한 정당 현수막법’이 시작됐다.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당의 현수막을 사전 신고나 허가 없이 걸 수 있게 한 것이다. 불법 현수막의 합법화 반란이었던 셈이다. 당시 정부는 도시 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의 보행권을 방해하며, 동네의 상가나 사회단체, 무소속 국회의원, 정치 신인 등 여타 수요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반대했으나 횡포를 막을 수 없었다. 현재 정당 현수막으로 인한 불법 현수막 민원이 기존의 2배 이상에 이르렀고 담당 공무원은 법률에 따라 적법하다고 대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결국 폭증하는 민원에 행정안전부는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으나 속수무책이어서 사실상 정당 현수막은 정치권, 정부, 지자체, 선관위 등 어느 주체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다못해 인천시의회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금년 6월에 현수막 설치 장소와 개수, 내용 등을 제한하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고 강제 철거에 들어가 시민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속이 다 후련하다”는 반응이었다.  이에 힘입어 서울시의회에서도 지난 8월 정당 현수막 난립을 규제하는 내용의 조례 개정안을 발의했고 잇달아 부산시의회, 광주시의회, 울산시의회에서도 조례 개정안을 발의 중이다. 상위법과 지자체의 조례간에 상충돼 충돌하자 행안부에서는 법 준수를 유도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조례 개정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새변)은 8월에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와 함께 옥외광고물법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고 전국 17개 광역 시·도지사도 정당 현수막 특혜 폐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서울특별시옥외광고협회 송파구지부’는 이미 지난 6월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정당 현수막 난립을 개탄하며 불법적인 형태의 정당 현수막 제작을 거부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국회의원은 일반인과 기관에 대한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10년째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곧 정치인 불신이자 정당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당 현수막은 불 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법 위에 시민들의 민심이 있음을 알고 정당 현수막 걸기를 스스로 자제했으면 한다. 경주시의회에서도 조례 개정에 속도를 내고 다른 도시에서처럼 지정 게시대에 한해 국회의원 선거구별 2개 또는 4개 이하로 수를 제한했으면 한다. 또 정당 활동과 관련한 정치적 견해 표명이나 정책 비판이 아닌 개인에 대한 비방이나 모욕 등 혐오 문구를 철저히 금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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