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 연재를 통해 효열(孝烈)에 대한 기사를 다루다가 우연히 ‘호랑이’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였는데 대단한 효행 스토리가 있어 소개한다.
한반도의 호랑이는 일제강점기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이래로 종적을 감췄다고 하며 예로부터 호랑이는 용맹과 악귀를 쫓는 수호신의 의미 반면에 때로는 민가에 내려와 사람을 해치는 잔악한 괴수로 묘사된다. 조선 초기에 호랑이로 인한 인명피해를 보면 경상도가 가장 많았으며, 조정에서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별도의 착호갑사(捉虎甲士)가 있을 정도였다.
신라 진덕왕 때 알천(閼川)공․유신(庾信)공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화백회의를 하는데 갑자기 난입한 호랑이를 알천공이 맨손으로 꼬리를 잡아 메쳐 죽인 일을 보면 경주 남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점이 매우 신기하다.
1734년 경주에 사는 과부 김조이(金召史)와 유황군(硫黃軍) 김자안(金自安) 등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등 조선시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 죽였다는 실록의 기록이 상당하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덫을 놓아 반드시 잡도록 엄한 분부를 내리며 호랑이를 잡은 자에게 재물과 벼슬을 내렸으니 당시 호랑이는 백성의 목숨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경주 외동읍 원동(院洞)마을에 호랑이와 얽힌 남양홍씨세천(南陽洪氏世阡) 정렬각(㫌㤠閣)이 있다. 영조년간 어느 여름 날에 남양홍씨 홍계발(洪啓發)의 부인 월성김씨와 나주정씨 두 아내가 길쌈을 하고 있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남편을 해치려 하자, 이불로 호랑이를 덮어 날카로운 아가리를 막고, 한 명은 부엌칼[포도(庖刀)]로 호랑이를 찌르고, 한 명은 절굿공이[도저(搗杵)]로 호랑이를 내리쳐 남편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이는 아내가 목숨 바쳐 남편을 구한 열부(烈婦)스토리로 해석된다.
성종년간 1490년 6월에 경상감사가 효자ㆍ효녀의 행적을 보고하였는데, 경주인 김윤손(金允孫)은 어느 날 호랑이가 그의 아비 김소남(金召南)을 물어 가자, 맨손으로 뒤쫓아가서 왼손으로는 범의 턱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서 때려죽여 아비를 구한 일을 아뢰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평양으로 이주해야하는 사민(徙民)에서도 면제되었으니 김윤손의 효행의 특이함을 알만하다. 이 일은 『해동잡록』에도 실려있다.
영조년간 1733년 10월에 경주 역리(驛吏) 박상희(朴尙希)의 딸 19세 초랑(楚娘)이 그 어미와 산전(山田)에 갔다가 그 어미가 호랑이에게 물리자, 초랑이 통곡하며 ‘지난날에는 우리 오라버니가 호랑이에게 물렸고, 이제 또 우리 어머니가 물렸으니, 차라리 함께 죽고 말겠다.’라 하고는 왼손으로 그 어미를 안고 오른손으로 낫을 잡고 휘둘러 그 어미의 시신을 빼앗은 사실이 있었다. 이에 절도사가 장문(狀聞)하여 임금이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참으로 용맹한 초랑의 이야기이다.
영조년간 1735년 1월에 경주 군관(軍官) 박남구(朴南耉)는 호랑이가 어머니를 물어뜯자, 호랑이와 치고받고 싸워 호랑이가 어머니를 내버리고 달아나 죽음을 모면하였다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여 정문을 세워 포장(褒獎)하였다.
효행은 부모와 자식의 천륜지정(天倫之情)으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부모든 자식이든 곤궁에 처한 급박한 상황에 초인적 힘을 생겨나 위기를 벗어난 경우를 종종 본다.경주와 호랑이 이야기처럼 효행을 드러낸 더 많은 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며, 경주의 유학자가 남긴 문집과 고전번역을 통해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