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의 이면과 측면에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런데 ‘利見臺’가 아니고 ‘利見坮’이다. ‘坮’는 ‘臺’의 고자(古字)로 같은 의미의 글자이다. 측면에는 이 비를 세운 날짜가 표기되어 있는데 단기 4313년 경신년 1월이니, 서력기원으로는 1980년이다. 후손들이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망자의 9-10세손들이다.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본다면 약 225-3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건립된 비이다. 그렇다면 이 비의 주인공이 돌아가신 해는 1680-1765년 경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저기 와편(瓦片)이 보이고 특히 대왕암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모 모임에서 산행을 하던 중 처음 이곳을 지난 적이 있다. 주위에서 누군가가 이곳이 진짜 이견대 터라고 했지만 그때에는 문화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다. 이후 몇 차례 이곳을 지나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곳이 진짜 이견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주 외동 출신의 의병장 이눌(李訥, 1569-1599)이 남긴 『낙의재유집(樂義齋遺集)』에 ‘癸巳四月十一日 進軍于利見臺下’ 즉 ‘계사년(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4월11일 이견대 아래로 진군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 이견정의 위치가 맞는다면 ‘이견대 옆으로 또는 그 위로 진군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눌의 기록에 의하면 산 위에 있는 이곳이 이견대라야 하는 것이다. 앞서 묘의 주인공이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되는 때 이견대는 이미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묘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견대가 있는 곳의 마을이 ‘대본(臺本)’이다. 여기서 ‘臺’는 ‘이견대(利見臺)’를 ‘本’ ‘근본 본’이나 이는 지사문자(指事文字)로 나무(木) 아래에 줄을 그어 나무의 뿌리 즉 ‘아래’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대본’은 ‘이견대’의 아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 이견대는 대본의 아래에 있으니 맞지 않다. 그러므로 대왕암이 한눈에 조망되는 이곳이 이견대가 있던 자리라야 한다. 이곳을 지나 왼쪽으로 300m를 내려가면 바로 감은사이다. 그러니 이 오솔길이 감은사에서 대왕암까지 가는 지름길이다.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이튿날 바로 이 장소에서 감은사 쪽으로 둥둥 떠 오는 산을 보았을 것이다. 1967년 발굴조사를 통해 구 대본초등학교 아래에 있는 이견대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확인한 당사자인 황수영 박사도 이후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산 위 이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을 시사했으니 언젠가는 이 일대의 발굴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견대에 대해 마무리를 하면서 몇 차례 쓰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하면서 문득 영국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의 다음 일화가 머리를 스친다. 어느 날 저녁 오스카 와일드에게 이웃 사람이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선생님께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오스카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전에 시를 한 편 손질하면서 쉼표 하나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다시 그곳에 쉼표 하나를 끼워 넣었지요!” 오스카 와일드에 자신을 비유하는 것이 터무니없지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처음 쓴 글 그대로 원고를 완성하게 되었다. 조용헌은 ‘나의 글쓰기’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의 반만이라도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웅변가이고 자기 말의 반만이라도 글로 표현할 수 있으면 문장가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저 잡문을 끄적거리는 수준이니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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