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이후 온 유럽을 뒤흔든 바그너 음악극은 오페라 종주국 이탈리아에겐 크나큰 도전이었다. 여차하면 르네상스부터 이어온 종주국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는 베르디를 이을 난세의 영웅이 등장하길 학수고대하였는데, 그 영웅이 바로 푸치니(Giacomo Puccini/1858-1924)다. 푸치니는 4대가 음악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6살 때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소년 푸치니는 가업인 음악에서 멀어져갔다. 하마터면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푸치니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푸치니의 마음을 돌린 건 모친이었다. 아들을 고향 루카에 있는 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푸치니는 원래 교향곡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선배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고,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22세(1880년)에 명문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하여 오페라 라 조콘다(La Gioconda)의 작곡자인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1834-1886)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푸치니는 재학 중에 빌리(Le Villi/1884)라는 오페라 작품을 선보이게 되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리코르디(Ricordi) 출판사의 후원을 받게 된다. 리코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4대천황인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 베르디의 악보를 이미 출판한 회사다. 푸치니에게 꽃길이 열린 것이다. 오페라계에 푸치니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최초의 작품은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1893)다.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귀족 그리외와 매혹적인 평민 처녀 마농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후 푸치니는 리코르디의 넉넉한 후원에 힘입어 걸작들을 쏟아낸다. 불과 3년 만에 보헤미안 청년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풀어 낸 라보엠(La Boheme/1896)을, 20세기가 시작된 해에는 하룻밤 사이에 세 명이 죽는 비극 토스카(Tosca/1900)를, 이어서 일본여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나비부인(Madam Butterfly/1904)을 발표하여 명실상부 최정상급 오페라 작곡가로 떠오른다.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을 푸치니의 3대 걸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베르디의 중기 3부작 리골레토, 일트로바토레, 라트라비아타에 비유된다.
푸치니의 대본작가는 독특하게도 2명이다. 일반적인 대본작가 외에 시적 표현을 담당하는 작가가 필요했다. 라보엠을 만들면서 푸치니는 리코르디에 두 명의 작가를 요청했는데 바로 루이지 일리카(Luigi Illica/1857-1919)와 주세페 자코모(Giuseppe Giacoisa/1847-1906)다. 일리카가 만든 이야기에 자코모가 시적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푸치니의 3대 걸작은 이들의 환상적인 조합에서 탄생했다. 이들 작품은 음악뿐 아니라 대사 또한 탁월하다. 오늘날까지 푸치니의 작품이 유난히 사랑받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