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전씨 사서(沙西) 전식(全湜,1563~1642)은 중국과 사신 외교관으로 활약한 인물로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외직을 요청해 1631년 12월부터 1633월 4월까지 경주부윤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울산부 판관·예조정랑·병조참의·좌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간에 무려 네 번이나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강직한 인물이다. 유성룡(柳成龍)과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함께 상주지역의 상산삼로(商山三老)라고 불렸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경주 오악(五嶽)의 하나인 소금강산은 이차돈(異次頓,506~527) 순교 이후 금강경(金剛經)과 연계되어 금강산으로 불리웠다.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하는 법흥왕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남간사(南澗寺)의 일념(一念)스님이 지은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과 『향전(鄕傳)』에 이차돈의 활약과 사찰을 짓는 과정이 언급되었는데, 결국 법흥왕은 이차돈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였다. 『해동고승전』 염촉(厭燭)의 순교에는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목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용솟음쳐 높이 수십 길로 솟아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였다.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舍人)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유체(遺體)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하고 예배하였다”고 전한다. 소금강산이 이차돈의 순교 현장으로 기록되며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소금강산에 자추사(刺楸寺)를 세웠고, 훗날 자추사는 백률사로 개명된다. 이차돈 순교의 진위여부를 막론하고 신라의 불교를 성행하는데 일조한 사실은 자명하다. 영조 5년(1729)에 조적명(趙迪命)이 “그가 ‘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의론을 진정시키소서’라고 한 말은 심히 미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잘린 목에서 피가 용솟음치고 흰 빛깔이 마치 젖과 같았다고 한 것은 더욱 괴이합니다. 그때 마침 불법이 크게 성행할 운세를 만나 민중을 미혹하는 이런 일이 있었지만 어찌 불법에 영험함이 있겠습니까”라 아뢰었고, 이만유(李萬維) 역시 “이런 일은 모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입니다”며 맞장구쳤다. 영조 역시 “그렇다. 신라의 정사가 처음에는 훌륭했으나 말세에 이르러 점차 사리에 어긋나고 혼란스러운 일이 많아졌다”라 하였다. 선조 38년(1605) 12월에 사헌부에서 “주서(注書) 전식은 인물이 용렬하고 명망도 없어 당후(堂后)의 직임에 합당하지 못하니 개정하소서”라며 그의 인물됨을 낮게 평가하였고, 경주부윤 재임 당시에도 그의 행적을 거의 알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인조 16년(1638) 7월에 주화파 최명길이 “전식은 충성스럽고 순후한 자입니다. 성상께서 항복[下城]하였을 초기에 사대부들은 모두 달아나고 흩어졌는데, 전식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의가 없이 모두 와서 공직(供職)하였습니다”라 아뢰자, 임금이 “전에는 전식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훌륭한 사람인 줄을 알았다”라 하였다. 전식은 임진왜란에 진사 강주(姜霔)와 의병을 일으켰고, 병자호란에 의병과 곡식을 모아 충주 노동(櫓洞)에 주둔하며 임금을 비호한 적이 있었다. 경주부윤 재직 시절의 빼어난 업적은 없지만 그의 행적이 훗날에 재평가된 점은 인물됨이 평소에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에 힘쓴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백률사를 소재로 문학작품이 다수가 창작되었지만 고려의 정지상(?~1135)과 조선의 김시습(1435~1593), 홍직필(1776~1852) 등 25여명의 제영시가 확인된다. 주로 왕과 신하가 태평을 기원하고, 불교의 성지로 예불하며 세속의 번뇌를 씻었으며, 신라 망국의 한을 읊조린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경주부윤 전식은 백률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며 백성의 안위와 농사를 걱정하며 기우제를 지냈다. 백률사 기우문(柏栗寺 祈雨文) - 경주부윤 전식 이곳 금강산은 동도의 진산(鎭山)으로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고을의 은덕과 혜택이었건만 어찌하여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이 맑고 높기만 합니까? 해는 하늘 높이 환히 비추며 돌고 있으니 아! 우르러 바라만봅니다. 보리는 이미 큰 흉작이고, 백성의 목숨은 멈출 때가 다가옵니다. 시름을 굽어 살피옵소서. 어찌 차마 이것을 견디겠습니까? 감히 현묘의 문을 두드리며 변변찮은 제수를 공경히 바치오니, 한줄기 비를 내리시어 재앙이 복으로 바뀌길 간곡히 기원드립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