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와 지중해, 에게해에 둘러싸인 터키. 인구 7천100만명, 남한의 8배에 이르는 면적을 지녔으며 땅 대부분이 초원이고 지하자원도 매우 풍부한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큰 나라 중의 하나다. 국토의 97%는 아시아, 나머지 3%는 유럽에 속해있는 위치적 특성 때문에 인류문명의 격전장이며 동서문화의 교류지이다. 따라서 터키는 고대 히타이트에서 알렉산더, 페루시아, 로마, 오스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국들이 번갈아가며 점령했으며 때문에 모든 문화가 절묘하게 어울려 공존하는 인류문명의 박물관이기도하다.
지금 이 땅을 차지해 8천여년의 역사적 산물을 고스란히 차지한 터키인들은 원래 중앙아시아의 돌궐족인 투르크(TURK)족이다.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이은 오스만투르크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혼혈정책으로 외모는 서양인들에 가깝지만 우리와 습관 등 문화가 비슷한 것이 많았으며 친절하고 인정이 있는 순박한 인간미를 지녔다.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가진 터키. 6.25전쟁에 1만5천명의 군대를 파견한 혈맹이며 형제국이다. 터키인들 대부분은 대한민국을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은혜를 입은 우리 국민들은 터키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터키는 비록 몸뚱이의 대부분은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문화와 생활은 유럽을 지향한다. 최근 터키 젊은이들 사이에는 삼성핸드폰의 인기가 최고란다. 그래서 이들은 삼성핸드폰을 가지는 게 꿈이라고도 한다.
[로마~오스만 1천600년의 수도 이스탄불]
누구나 이스탄불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로마와 오스만 두 제국의 수도로서 1천500년간 그 번영을 누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환상의 도시 이스탄불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이후 행정수도를 앙카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터키의 제1도시인 이스탄불은 토인비의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는 칭송처럼 도시자체가 히타이트, 오리엔트, 그리스, 비잔틴, 회교문명 등 인류가 이룩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가 역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또한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종착역이다. 경주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 가운데 이곳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면 신라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곳 이스탄불까지 오갔을 당시 신라인과 서역인들의 자취가 여기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가사크리스티 ‘특급열차 살인사건’의 오리엔탈 특급열차 마지막 종착역도 이곳이다. 여기서 출발한 기차가 루마니아, 헝가리, 파리까지 간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해협을 중심으로 동서양 양 대륙에 걸쳐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는 구 이스탄불과 상가, 사무실이 결집한 신 이스탄불 그리고 밀집주거지인 아시아 이스탄불 등 3개 권역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성 소피아(HAGHIA SOPHIA; 신성한 지혜)
세계최대의 건축물이며,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성소피아성당은 본당의 돔 높이가 56m로 중앙의 돔은 4개의 아취가 바쳐주고, 이 아취들은 다시 4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었다. 40개의 창문은 실내의 조명을 밝게 해주는 동시에 돔 자체의 무게도 경감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본당의 녹색 기둥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르테미스신전에서, 네 귀퉁이의 8개의 붉은 기둥은 헬리오스신전에서 가져왔다고한다. 이 기둥들의 꼭대기 머리는 코린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 때 100명의 기술자와 1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5년(537년 12월 27일)만에 이 성당의 지은 황제는 너무나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앞질렀오"하고 외쳤다 한다.
이 성당은 약 1천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으로 사용되다가 오스만 제국의 정복으로 약 500년 동안 이스탄불 왕실의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며, 1935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기독교 성화와 이슬람의 성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성당에서 사원, 지금은 박물관인 이곳은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성당의 건축양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대리석문양과 색상을 이용한 벽면처리나 조각, 회를 떼어낸 곳곳에 드러난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모자이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중앙돔의 남쪽에는 황금으로 모자이크한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상이 있었는데 이 벽화들은 오스만제국시대에 회벽칠을 하여 나중에 덧칠을 벗겨낸 것이라 한다.
이곳 한 기둥에 구멍이 나 있는데 그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끼우고 손을 360도 회전하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손가락을 넣고 돌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성당 중앙에는 공사용 거푸집이 설치되어 있어 한눈에 성당 전체를 볼수없음이 안타까웠다. 돔이 함몰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9년전에 설치, 아직도 공사 중이라고 했다.
황제가 앉는 자리와 왕비의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전제군주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2층 군데군데에 회를 떼어낸 자국이 있었다 그 떼어낸 자리를 통해서 실내가 온통 황금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회속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원형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블루모스크(BLUE MASQUE)]
성소피아 사원 바로 맞은편에는 6개의 첨탑을 가진 블루모스크가 있다.
블루모스크는 사원의 내부가 청록색의 화초 모양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술탄 아흐멧 1세가 소피아 성당에 버금가는 모스크를 지을 목적으로 1609-1616 사이에 건축하였다.
돔은 직경 27. 5m, 높이 43m로 6개의 첨탑이 세워졌다. 왕이 전쟁터에 가면서 금으로 첨탑을 하라고 지시를 했는데, 금과 발음이 비슷한 「6」으로 잘못 듣고 첨탑을 6개 만들었다고 한다.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크고 넓지만 참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유리에 아로새긴 각종 문양의 모자이크가 더욱 아름답게 했다.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서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신발을 벗고 예배소와 분리된 관광객 전용공간에 들어가 예배광경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톱카프궁전]
오스만 제국시대의 톱카프궁전은 소피아성당과 인접한 보스포러스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약70만㎡ 넓이에 5Km의 성벽으로 둘려 싸여 있었다.
멋진 정원과 아름다운 대리석조각물들이 잘 어우러진 궁전은 대제국의 궁전답게 그 위용이 당당했다.
왕의 유품들을 진열한 곳에는 시대별로 왕의 복식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으며 수백년전의 디자인이 최근의 의상과 별 차이가 없는 아주 세련된 디자인이 놀랍다.
그리고 신성관에는 이집트 정복 후에 가져온 것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와 이슬람교와 관련한 모든 유물들을 전부 이곳으로 가져와 한 방에 진열해 놓았다.
마호메트의 망토, 칼, 깃발, 활, 발자국, 이빨, 수염, 그리고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요셉의 터번과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등도 보관되어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세의 지팡이였다. 시나이산에서 나는 흔한 나무를 꺾어 양도 몰고 지팡이로 사용했다는 안내자의 이야기가 수긍이 갔다.
[보스포러스해협]
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면서 아시아와 유럽대륙의 경계선인 보스포러스해협은 마치 강처럼 좁은 해협이었다. 길이 31Km, 폭은 넓은 곳이 4Km, 좁은 곳은 600m이다. 평균 수심은 40m로 수면의 바닷물은 흑해에서 지중해 쪽으로 흐르고 있으나 염도 때문에 바다 속은 지중해에서 흑해로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해협을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는 것이 이스탄불의 필수적인 관광코스였다.
유람선은 약 500석 정도의 2층의 선실을 갖춘 평범한 배였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유럽인들이었다. 흑해에서 이 해협을 거쳐 에게해, 지중해로 흘러가는 바닷물위에서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을 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로 흥분되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위스키다르”가 터키의 민요이고 그 위스키다르를 바로 이곳 해안의 한 고장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위스키다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황금빛으로 물들게 한다하여 일명 "황금의 市"라 불렸다. 아시아의 모든 길이 여기서 끝나는 아시아의 땅 끝 마을인 셈이다. 오스만의 왕들은 모스크와 대상들의 숙소를 이곳에 마련했고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아지역 참배객들은 매년 그들의 순례 여행을 이곳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경주에서 발원한 실크로드의 마지막 종착지도 여기일 것이다.
지금은 이 곳에 해협을 가로 지르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있어 동서양의 교류를 더욱 원활하게 하고 있다.
[지하궁전(저수지)]
비잔틴 제국시대에 성소피아 성당을 지으면서 남은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지하궁전은 일종의 저수조로 성소피아성당 앞에 있었다.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차라리 궁전이라는 것이 더 어울렸다. 이스탄불에는 많은 지하저수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가로 140m, 세로 70m에 도리아식과 고린도식의 높이 8m 기둥 336개가 약 4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지하지만 환기가 잘 되는 듯 공기가 맑았고 바닥에 조금 채워진 물도 아주 깨끗했다. 맨 안쪽 구석진 곳에 두개의 기둥 주춧돌이 눈길을 끌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희랍신화의 우상숭배사상을 타파하기위해 메두사 여신상을 목을 잘라 머리부분만 주춧돌로 사용했는데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기둥을 받친 채 1천500년을 견디고 있었다. 종교적 이념이 빚은 슬프고 무서운 역사현장이었다. 007영화 "From Russia with love"의 몇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