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말이 있다.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난다는 의미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20년 유배생활 동안 공부하고 또 공부하다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또 추사 김정희는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문화재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문헌을 뒤지고 현장을 답사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 고사를 대하고는 스스로 더욱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특히 이번 문무왕의 비문을 대하고는 자신이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문무왕의 비편이 1796년(정조 20)경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탁본이 청나라의 유희해(劉喜海)에 의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리게 되었다. 『해동금석원』에서는 탁본이 4장임에 근거하여 4개의 비편으로 보았다. 하지만 실물은 그 행방이 묘연했다가 1961년 비석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되었고, 또 상단 일부는 2009년 9월 경주문화원 향토사료관 바로 북편 주택의 수돗가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편 2개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비편은 신라 역사의 블랙박스이다. 그 비밀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후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그리고 그의 비는 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682년 지금의 경주 사천왕사 터에 세워진 것이다. 현재 사천왕사지 남쪽에 남아있는 귀부 2기의 비좌 구멍과 2개의 비편 중 큰 비편의 하부에 돌출한 촉의 치수를 대조한 결과, 서쪽의 귀부가 문무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천왕사에 문무왕의 비가 있었던 것은 이 사찰이 문무왕 때 창건되었고 시신을 화장한 곳이 이 인근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 즉 신라 김씨의 가계와 관련해서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신라 김씨의 조상을 흉노족으로 보았거나, 적어도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다는 암시가 등장한다.
확인된 비문에 의하면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고 밝히고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했다[傳七葉]”는 구절이 있다.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했으며, 한 무제로부터 김(金)씨 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한서』 「열전」 ‘김일제전’에 나온다. 여기서 ‘제천지윤 전칠엽’은 신라 문무왕 선대의 7대 전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비문 자체가 깨지고 멸실된 부분이 워낙 많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측면은 있다. ‘투후 제천지윤’은 『한서』 「열전」에 나오는 김일제(金日磾)라는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134년에서 기원전 86년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로 한나라 장수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포로가 되었다. 투후는 중국에서 김일제 이외에는 아무도 받은 적이 없는 시호였다. 문무왕 비문에 있는 ‘투후’가 흉노족 김일제를 가르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문무왕 비에 나오는 15대조 ‘성한왕’, 문무왕 동생 김인문 비에 나오는 ‘태조 한왕’, 흥덕왕 비에서는 24대조 ‘태조 성한왕’이 등장한다. 투후에 이어서 나오는 성한왕과 흉노족 김일제와의 깊은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신라 김씨 족보에서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이 ‘세한’으로, 『삼국사기』에도 세한이 김알지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등장하는 투후는 신라 김씨 왕조의 조상이라 여기는 김일제로 그는 흉노 사람이다. 그렇다면 경주 김씨의 시조가 흉노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금궤에서 나왔다는 ‘알지(閼智)’를 김씨의 시조라고 한 것과는 다르다. 비문을 1차 사료로 본다면 후대의 역사 기록은 2차 사료가 된다. 그렇다면 문무왕의 비문의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김일제 또는 그의 후손이 신라로 왔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