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제밤 꿈에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치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실연의 아픔과 이를 다스리는 균형의 미학 사랑을 잃고 쓰여진 시다. 젊은 시절 한번쯤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가장 절실한 서정은 어쩌면 실연 후에 오는 것이 아닐까? 목월 선생이 「소곡小曲」이라는 제목을 「대숲 아래서」로 바꾸어 주었다고 전하는 나태주 시인의 등단작인 이 작품은 ‘대숲’이라는 소슬한 자연 속에서 실연의 아픔을 삭이는 시다. 얼마나 착잡했으면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고 했을까. 갈 곳을 잃고 서성이는 시인의 모습이 애잔하다. “그슬린 등피에” 어리는 네 얼굴로,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로 밤새 애를 끓인 화자는, 급기야 “꿈에 너를 만나 쓰러져 울”고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을 남길 정도다. 그러나 이 시는 4에 이르러 상실감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상태를 확보하기 시작한다. 너를 잃음으로서 세상을 다 잃었다는 표현을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이라 에둘러 말하면서부터다. 그러니 “서녘구름”과 “떠드는 애들의 소리”,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은 “내 차지”가 될 수 있는 것. 다음 표현은 더 절묘하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이 가을”이라는 이중부정의 역설을 통해 마음의 평형의식을 은근히 확보하고 있는 것. 이 안정감은 “저녁밥 일찍이 먹고/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구절의 차분한 묘사까지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실연 후 그 사랑에 대한 시를 씀으로서 완전한 상실감을 극복하는 거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실연의 체험에서 긴장과 균형 의미 있는 하나의 미학을 만들어낸 시인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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