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金鰲新話)! 그 靈感의 産室, 은적암과 쌍봉 은적암(隱寂庵) 절터를 찾았다. 11월 3일 오후 3시.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하천을 건너 용장계곡을 5분정도 오르다 보니 고위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은적골이 나왔다. 일행들과 함께 잠시 쉬면서 은적골 제1절터의 돌축대를 살펴 보았다. 용장골 본류와 은적골이 만나는 지점에 아담한 물 웅덩이가 있다. 그 옛날 단아한 정각이 푸른 물에 그림자를 비추었을 아름다운 정경을 상상하면 참 조상들은 자연 환경을 잘 어울리는 산사(山寺)를 지었나 보다. 여기서 계곡물을 거슬러 200미터 쯤 들어가면 성터로 보일만큼 거대한 돌축대의 은적암 제2절터가 또 나온다. 여기서 또 200미터 쯤 올라가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우측 서쪽 계곡으로 들어가면 수리산 정상 가까운데 전망좋은 은적암 제3절터가 있지만, 우리 일행은 왼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걸어올랐다. 숨이 찰만큼 가파른 길에 소나무 깔비만 쌓여 발길이 미끄러지기를 여러번 드디어 푸른 대나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남산을 오르다 대나무 숲을 발견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남산에서 대나무는 거의 100% 절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은적암(제4절터)에 도착했다. 고 윤경렬 선생님은 네 곳의 은적골 절터들을 용장계 제7,8,9,10 절터라고 이름 붙이셨다. 물도 한 방울 나지 않고 평지라곤 오로지 금당터로 보이는 좁고 평평한 곳 뿐이지만 작은 1층 탑신과 1층 옥개석이 우리를 반겼다. 탑신에는 4각으로 패어진 사리공이 있고 옥개받침은 3단이었다. 2,3층 옥개석은 열반골 관음사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금당터에 개인 묘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금당 주춧돌이 하나는 완전하였고 또 하나는 산소 봉분에 거의 다 묻히다시피 하였는데 조각솜씨를 보면 어느 절터 못지않은 정교한 주춧돌이었다. 이런 외진 절터에 누가 살았을까? 저 아래 계곡까지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한숨 돌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좌우를 둘러 보았다. 금당터에서 바로 앞 서편을 바라보면 수리산(고위산)을 기어오르는 이무기 능선이 보였고, 왼쪽 남쪽에는 고위산 정상이 보였다. 그런데 오른쪽 북쪽을 바라보니 곧 터질 것 같은 볼록한 봉우리가 하나 보였는데 일명 태봉인 쌍봉이란다. 은적암 절터에서 바라볼 땐 분명이 하나의 봉우리였는데, 올라보니 두 개의 봉우리인 쌍봉(雙峰)이었다. 5분쯤 더 등산하여 쌍봉에 올라서니 갑자기 가슴이 확 터지는 것 같았다. 북으론 금오산, 남으론 고위산, 서쪽으론 이무기능선은 물론이요, 용장골 전체가 발 아래 누워 전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다 보여준다. 대연화좌대도 저만치 보이고, 특히 지난 주 용장사 터를 답사할 때 계곡에서 올려다 본 용장사3층 석탑이 그렇게 높이 보였는데도, 쌍봉에서 내려다보는 용장사 3층 석탑은 왜 저렇게 작게 보이는지... 용장사 3층 석탑을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이라고 가정하면 이곳 쌍봉 정상은 마치 미륵부처님이 하생을 기다리시는 도솔천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까이서 그렇게 장엄하던 용장사 탑이 저 만치 발아래 조그만 점으로 보였다. 올라오다보니 우리 같은 문화재 답사팀이 아니면 거의 인적이 드물은 은적골.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이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느낌을 줄 수가 없다. 그래서 금오신화를 지었던 김시습이 세조가 보낸 조정의 사신을 피해 숨었다는 은적골의 유래가 있었나 보다. 김시습이 금오산 용장사터 금오산실에서 금오신화를 지었지만, 아마 이곳 은적암과 쌍봉에서 더 큰 영감을 얻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은적암을 지나 이곳 쌍봉에 오르기 전까지는 속으로 답사 안내자를 원망도 많이 했다. 이것은 문화재 답사가 아니고 단순한 등산이라 생각했다. 거의 1시간 반 정도 오르는 동안 3곳의 절터, 그것도 축대 돌만 조금 보고 작은 탑신하나와 옥개석 그리고 금당 주춧돌 2개 뿐인 은적암 절터 보러 이 고생을 했나 싶었다. 그러나 쌍봉에 올라보니, 남산 어느 봉우리 보다도 더 아름다웠고, 이보다 더 벅찬 느낌을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경주에 가면 남산을 오르고, 용장사지를 보지않고는 남산을 다녀왔다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난 더 붙이고 싶다. 은적골 쌍봉(태봉)을 오르지 않고는 남산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용장사지에서 집필하였으나, 사실은 이 은적암과 쌍봉을 오가면서 더 큰 영감을 얻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소식에 통분하여, 책을 태워 버리고 중이 되었던 김시습. 금강산 오대산 다도해등 전국을 방랑하였던 김시습. 효령대군의 청으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에 참여하다 다시 회의를 느껴 경주 남산에서 칩거했던 김시습. 처음 은둔했던 이곳 은적암과 쌍봉에서 큰 영감을 얻고 용장사지로 옮겨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남겼다. 은적암과 쌍봉은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의 감흥을 모르리라! 사진설명: 쌍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용장사터(왼쪽 아래 타원부근)와 용장사지3층석탑(중앙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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