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은 제576돌을 맞은 한글날이다. 우리말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날이 대체공휴일에 가려 눈에 띌 기념행사 없이 지나가 씁쓸함을 느낀 이도 많을 듯하다. 경주에서 평생을 외국어 남용에 맞서 싸우시던 최햇빛 할아버지의 한글사랑이 우리들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글사랑과 우리말 보급에 평생을 바쳐온 한글 할아버지 최햇빛 선생은 지난 2000년 10월 30일 9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열정만큼은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최햇빛 선생은 ‘감사합니다’를 일제 잔재라 하며 ‘고맙습니다’로 바꾸기 위해 청와대, 국회 등에 수 천통의 서신을 보냈다. 제사 때 많이 쓰이는 ‘신위’, ‘화환’, ‘대축제’를 ‘혼모심’, ‘꽃두레’, ‘대잔치’ 등으로 바꾸자며 정부와 각 사회단체에 건의한 것만 1000여건에 이른다. 정감 있는 한글이름을 지어 부르자며 자신의 이름을 최칠규에서 최햇빛으로 고치고, 학생들과 주위에 한글이름을 지어준 것도 무려 4000개가 넘는다. 할아버지는 계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식민교직에 분노를 느끼고 자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초등학교 시절엔 일어사용을 강요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어떤 말이나 소리도 마음대로 낼 수 있는 훌륭한 우리말이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못한 당신들 말을 써야하는가?”라고 따질 만큼 민족의식도 투철했다. 또 젊은 시절엔 ‘한글소설독서회’를 결성했는데 일본의 한국문화말살 정책에 맞서는 독립운동으로 간주돼 만주로 도피까지 했다. 지금 경주 해맞이마을에는 ‘밤길도 오래 걷다보면 새벽을 맞이한다’는 글을 새긴 비가 있다. 이 글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두고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다 이제 그만하소”라고 할 때 선생이 한 말이다. 현재 우리는 TV나 신문, 광고판에는 외국어가 난무하고, 인터넷과 SNS에서는 은어와 속어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한글날을 맞아 고독하고 고난한 길을 걸으며 한글사랑과 민족혼을 일깨우려 했던 최햇빛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과 열정이 경주에서만이라도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