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경주 도당산 아래를 지나 포석정을 돌아가는 길목을 지나노라면 1719년(숙종45)에 여러 어려움을 겪고 세워진 노론계 인산서원(仁山書院)이 생각난다. 바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모신 서원이라 더욱 특별함이 느껴지지만, 서원의 흔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고 󰡔인산실기(仁山實記)󰡕 등 기록으로 전하는 서적만이 희미한 기억을 이어갈 뿐이다. 본지에 이미 인산서원과 향전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지만, 정작 인산서원과 밀접한 인재(忍齋) 한시유(韓是愈,1670~1723)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한시유 선생에 대한 인물정보가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우암 사후에 경북의 남인지역에서 노론계 우암의 배향을 둘러싸고 1704년(숙종30)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 1707년(숙종33) 포항의 죽림서원(竹林書院) 등 서원건립이 왕성하였고, 이에 반해 향전(鄕戰:향촌사족 간의 갈등)이 발생하며 지역유림 간에 마찰이 수차례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우암은 포항 장기(長鬐)에서 5년간 유배되었다가 1679년 4월 거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경주부를 경유하였다. 이때 곡산한씨 둔옹(遁翁) 한여유(韓汝愈,1642~1709) 등과 접촉하였고, 이후 한시유(韓是愈)․한흥유(韓興愈)․한희유(韓希愈)․한재유(韓再愈) 등 곡산한씨의 주도로 우암을 모신 봉암영당(鳳巖影堂)을 건립하기에 이른다.인산서원이 건립되고 이후 1722년 경주부윤 권세항(權世恒,재임1722.4~1723.2)과 울산부사 홍상빈(洪尙賓,1672~1740)을 비롯한 남인계 지역유림들이 인산서원을 무단으로 철거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곡산한씨 한시유가 죽임을 당하며 지역유림 간 불안한 기운이 번졌고, 정권이 바뀌어 결국 1725년 계림사화(鷄林士禍)가 발발해 남인들이 화를 당하게 되면서 지역유림 간 향전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위 계림사화 사건과 관계해 필자는 2018년 동방한문학회에 「계림사화의 배경과 영향 고찰」 KCI논문을 발표하면서 경주에서 발생한 향전을 다각도로 살펴보았고, 한시유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인산실기』에 의하면, 인산서원은 우암 송선생을 모신 곳이다. 지난번 기해년(1719) 본읍의 한씨[한시유]가 동지 5,6명과 함께 부의 남쪽 봉암 아래에 영당을 창건하였다. 임인년(1722) 여름 6월 부윤 권세항이 산관(散官) 김세평(金世平) 등과 훼철하였다. 훼철 시에 진사 한시유 공이 운명하고 영정의 지보(支保)에 대해서는 지난 해 사적에 모두 실려 있다. (󰡔仁山實記󰡕「仁山書院變記」,“仁山尤菴宋先生妥靈之所也. 越在己亥, 本邑韓氏與同志五六姓, 創建影堂於治南鳳巖之下. 壬寅夏六月, 府尹權世恒與散官金世平等毁撤, 毁撤時進士韓公之殞命, 及影幀之支保, 俱載於昔年事蹟.”) 봉암영당 건립과 훼철사건 및 한시유의 장살(杖殺:매를 쳐서 죽이는 일)로 대립양상은 심해지게 된다. 계림사화 발생이전 1709년에 한여유가 타계하였고, 그의 초상에 유림들이 슬픔을 같이하였는데, 당시 계림사화에 화를 당한 10인(孫汝智․李德標․柳恒瑞․金禮甲․李大觀․崔南鳳․權潗․李立中․曺善道․李光熹) 가운데 김예갑․이대관 등이 한시유와 더불어 만사(輓詞)를 지어 슬픔을 위로한 것으로 미뤄보면 영당훼철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만 하더라도 지역유림 간 상황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판단된다. 다만 1722년 봉암영당 훼철사건으로 노론의 한시유가 장살을 당하면서 유림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곡산한씨 내에서도 노론과 남인으로 갈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후 을사년(1725) 부윤 조명봉(趙鳴鳳,재임1725.5~1725.11)이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남인 가운데 10명이 유배 등을 당하는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 한시유는 1705년(숙종31) 증광시 3등 36위로 진사에 합격해 관로의 길을 걸었다. 후손인 백천재(百千齋) 한공한(韓公翰)은 송시열의 6대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1759~1838)에게 족보의 서문을 부탁하였고 “진사 한시유와 그의 족제 한배유(韓配愈)는 봉암 임인년(1722)의 변란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꺾이거나 굽히지 않았다. 평소 정한 뜻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서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이 어찌 아니었겠는가. 그와 같이 지조를 지키고서 만약 등용되었더라면 유익함이 있었을 것이지만, 운명이 다 똑같지 않은 것이 한탄스럽다. … 한공한은 나를 따라 공부하여 뜻을 도탑게 하고 옛것을 배운 사람이다”라 평가하였다. 󰡔인산실기󰡕는 상당부분 노론의 입장에서 기술된 측면이 많고, 남인과 노론의 입장이 조금은 다르게 기술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남인의 땅에 세워진 노론계 인산서원은 우암의 만남과 곡산한씨의 인연으로 어렵사리 세워진 서원이었다. 당시의 노론과 남인이 오가는 정국 속에 유림의 갈등은 깊어갔고,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의 본질 역시 흐렸다. 이에 인산서원을 지키기 위해 몸 바친 한시유 선생은 당시 경주의 노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인물로 판단되기에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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