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찍은 ‘경주’라는 이름의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주 시민들이 의외로 드물다. 주인공이 박해일, 신민아라는 당시나 지금이나 인기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배우가 나온 영화인데도 그렇다. 2014년에 개봉되어 비록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경주사람들은 알 만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았다거나 제목이라도 들은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영화 줄거리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화를 꼼꼼하게 관찰하지 않고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암시나 복선 같은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일반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영화가 제15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대상을 받았을 만큼 평단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실패작이다. 그래서 더욱 ‘경주’라는 제목이 아쉽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만큼 경주의 내면을 제대로 펼쳐낸 영화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다큐멘터리 찍듯 경주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찍은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는 경주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나마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 분)은 선배 창희의 장례식에서 창희와 오래전 경주의 어느 찻집에서 함께 본 춘화를 떠올리고 경주로 향한다.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 분)를 만나 오래전 본 춘화에 대해 묻는다. 윤희는 최현을 변태 취급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경주에 온 최현은 오래전 사귄 여정을 경주로 불렀지만 여정은 남편의 전화를 받고 급히 서울로 돌아간다. 다시 찻집을 찾은 최현은 윤희로부터 찻집을 인수한 5년 전 공연히 말이 많아 한지로 도배해 감추어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우연히 윤희와 동행한 술집에서 북한학전공하는 박교수를 만나 뜻밖의 유명세를 치른다. 그러다 자신을 윤희네 찻집으로 안내한 형사 영민이 합류해 보문호에 빠져 자살한 모녀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모녀는 최현이 대구와 보문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우현히 만난 모녀임이 확인된다.
취해버린 박교수의 막말로 판이 깨지고 낯선 이들과 노래방까지 거친 최현은 무엇에 홀린 듯 윤희의 집으로 함께 간다. 그것을 눈치 챈 윤희를 짝사랑하는 영민이 윤희 집으로 쳐들어오지만 여권으로 신분을 재확인하고는 허망하게 물러난다. 최현에게 거실에서 자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윤희는 방문을 슬며시 열어둔다. 최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 불화로 인해 중국을 떠나오면서 싸운 아내로부터 온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고 조용히 윤희의 집을 나선다. 어느 국수 가게에서 국수를 먹는데 여정으로부터 자기 남편이 자신을 쫓아 경주로 갔으니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자리를 옮긴다. 마침 여정이 경주 왔을 때 우연히 들른 점집 할아버지를 찾아갔으나 할아버지는 없고 대신 점집을 지키는 여인으로부터 그 할아버지가 5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는다. 무엇을 끌리듯 발길을 잡던 최현은 우연히 오토바이 충돌사고로 사람들이 널브러진 현장을 지난다. 이어 마른 하천을 지나 잡목이 우거진 야산을 넘어선 최현은 강을 발견한다.
장면이 바뀌어 춘화 앞에 앉은 최현과 창희, 최현의 친구 앞으로 윤희가 다가와 차를 따르는데 풍경소리가 들려오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처럼 상세히 적은 것은 이 줄거리에 경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경주의 유적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대신 경주의 능들이 꾸준히 나온다. 특히 대릉원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데 바로 이 무덤들이 이 영화의 모티브이자 경주의 내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묘한 장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하지만 각각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를 연출한 중국교민3세 장률 감독이 얼마나 경주를 열심히 탐구하고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정말 탁월하게 경주의 특징과 경주사람들의 내면을 간파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과연 어떤 부분이 경주를 잘 묘사했는지를 숙제로 남겨 드린다. 하나씩 퍼즐을 맞추다 보면 놀라울 만큼 큰 재미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유튜브에서 무료 상영 중이니 영화 찾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