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은 삼월삼짓날 귀정문루에 올라 “훌륭한 스님을 만날 인연이 있는 날이다. 누가 위의(威儀)있는 훌륭한 스님을 데려오라”고 했다. 마침 위풍당당하고 좋은 옷을 입은 스님이 지나가기에 모셔왔더니 왕은 “내가 만나려는 스님이 아니다”면서 스님을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스님이 헤어진 장삼에 망태기를 지고 오고 있었다. 신하들은 왕이 초라한 모습의 스님을 찾을리 없다 싶어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왕이 “저 스님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왕은 스님을 보자 반가워하며 “어디서 오는 길이요?”하고 물었다. “네. 저는 해마다 중삼(重三) 중구일(重九日)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공양해 왔습니다. 오늘이 삼월 삼짓날이라 차를 달여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그 차를 나에게도 한 잔 줄 수 있겠소?”“부처님은 만 중생의 어버이이시고 임금님은 만 백성의 어버이십니다. 어찌 차를 아니 드릴 수 있겠습니까?”스님은 풍로를 내려 숯불을 피우고 물을 끓여 차를 타서 임금에게 바쳤다. 차 맛이 신비스러웠고 사발에서는 오랫동안 향기가 풍겼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네 충담이라고 합니다.”“오! 저유명한 찬기파랑가를 지으신 충담이시오?”“그러합니다.”“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을 평안히 할 노래를 한수 지어주시오.”스님은 그 자리에서 노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노래가 ‘안민가’다.
경덕왕은 만족하여 “내 그대를 국사로 모실터이니 대궐에 있어 달라”고 청했지만 스님은 다구를 주섬주섬 거두더니 “중이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면서 두 번 절하고 도망치다시피 그 자리를 떠났다.
충담스님은 신라35대 경덕왕 때 사람이다. 경덕왕 때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워졌고 성덕대왕신종이 제작된 시기다. 남산 금송정(琴松亭)에서 거문고를 타면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옥보고, 피리를 불면 흐르는 달도 길을 멈추어 듣고 갔다는 월명스님이 모두 이때 사람들이다. 충담스님은 찬기파랑가를 지은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화랑도였다. 스님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 등 향가2편을 남겼다. 경주에서는 매년 4월초 충담스님을 기리는 충담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