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한 우리나라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는 일연(一然, 1206∼1289)이 서술한 5卷 1冊으로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노래·전설 등 야사들이 기술된 고문헌이다. 『삼국사기』는 나라에서 만든 역사책이고, 『삼국유사』는 글을 쓰는 방법이 자유로운 개인이 지은 책이다. 『삼국유사』에는 개를 표현한 견犬이 7회, 오獒가 1회, 구狗가 5회 나타난다. 이들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조상들의 개에 대한 정감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
犬·獒는 사실적 표현의 의미로 개를 나타내고 있다.『삼국유사』∙권제1 기이 제1 / 高句麗/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 왕이 이것을 내다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다 먹지 않았다. ∙太宗春秋公 / 王興寺僧皆見如舡楫隨大水入寺門 有大犬如野鹿 自西至泗沘岸 向王宮吠之 俄不知所之 城中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而散 / 왕흥사의 스님들이 큰물을 따라 배가 절 문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보았고, 들사슴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의 언덕까지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사 후에 가는 곳을 알지 못했다. 성안의 모든 개가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면서 시각이 지나자 흩어졌다. 그후 귀신이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말하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 柰勿王 金堤上 / 對曰 寧爲雞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 /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습니다”
『삼국유사』∙권제4 의해 제5 / 圓光西學 / 光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 원광이 말했다.
“6재일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요. 가축을 죽이지 않는 것은 말·소·닭·개 등을 말하는 것이다. ∙ 卷 第三 / 塔像第四 /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 十歳女児巡乞, 乃爲里獒所噬號痛卧於前, 父母爲之歔欷泣下数行. / 열 살 짜리 딸 아이가 밥을 빌러 돌아다녔는데 마을의 큰 개에게 물려 앞에 누워 아픔을 호소하니, 부모가 목이 메어 흐느껴 울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狗는 미래지향적 의미의 개에 대한 표현이며,『삼국유사』∙권제1 기이 제1 / 智哲老王 /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 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 왕은 음경 길이가 1자 5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신하를 3도로 보내어 짝을 구했다. 신하가 모량부 큰 노거수 아래서 개 두 마리가 북 만한 엄청나게 큰 똥덩어리 양끝을 물고 다투는 것을 발견했다.
∙권제2 기이 제2 / 第五十四 景明王代 / 貞明五年戊寅. 四天王寺壁畫狗鳴. 說經三日禳之. 大半日又鳴. 七年庚辰二月. 皇龍寺塔影. 倒立於今毛舍知家庭中一朔. 又十月. 四天王寺五方神. 弓弦皆絶. 壁畫狗出走庭中. 還入壁中. /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犬·獒는 사실적 표현으로 충성심의 비유하고, 가축과 지명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狗는 미래지향적인 벽사(酸邪)의 의미로 미래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사실적 표현의 기록은 柰勿王 金堤上의 충성심과 가축, 지명(犬城) 이야기 등이고,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기록은 지증왕(500∼514)때 개들에 의해 왕후를 간택한 혼사(婚事) 이야기와 경명왕(917〜924)시절 사천왕사지의 길·흉사를 미리 알려준 신비스러운 개 이야기 등이다. 고대 우리 민족은 개의 특이한 행동 표현이 사람들의 길·흉사를 미리 알려준다고 믿었다. 이 모두가 개와 함께한 조상들의 마음이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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