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중 우리 민족이 가장 성대하고 중요하게 여기던 의식이 상례였다. 세상 떠난 사람을 전송하는 남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픈 만큼 상례는 성대하게,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진행됐다. 그러나 전통적인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병원 장례식에서 간소화되어 진행되는 추세다.
지난 8월 18일 이남희 씨가 페이스 북에 상여길 풍경을 담았다. 어느 할머니의 상여 행렬을 사진가 김원묵 선생이 찍은 것을 받아 페이스 북에 올린 것이다. 그에 앞서 14일에는 자신이 직접 상두꾼이 돼 상여를 맨 소감을 올리기도 했다.
오전 11시30분에 출발한 상여가 장지까지 가는데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두 시간 진땀 뺀 이야기며 허리가 아파 상여 매다 만장 들다 반복하며 힘들어 한 사연도 올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내용은 목암 선생의 앞소리(선소리)다.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노래를 좋아해 상례문화에 노래를 접목했다는 사실을 이 선소리에서 알 수 있다. 서양에도 장송곡이 있지만 그것은 정말 대단한 귀족이나 엄청난 부유층의 점유물인 것과 대조적이다.
저승길 가면서 꽃상여 타고 노래를 들으면서 가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의 길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놀이라고 해서 대놓고 상례를 축제로 만들어 즐기기도 하는데 우리의 상례문화가 슬픔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꽃상여나 선소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기사에서 보면 가다서다를 반복했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원래 상여는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없어지기 전에는 양반들만의 상례문화로 상두꾼은 보통 집안 종복들이나 마을의 하층민들의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상여를 매고 가던 상두꾼들이 술추렴이나 용돈벌이를 위해 멈추기를 반복하면 일 시킨 양반들이 술이나 돈으로 노고를 위로했다. 신분 낮은 상두꾼들이 자신보다 지체 높은 양반들과 대놓고 흥정하는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 신분 간의 벽을 조금이나마 허무는 여유가 이 상여길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상여문화가 이제는 시골에서도 거의 사라진 것은 상여를 맬 사람도 상여를 꾸릴 사람도 점점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영상자료로만 남거나 문화재로 승격해 전문인들이나 전승인들에 의해 재현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그 귀한 자료가 SNS를 통해 공유된 것도 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