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인간의 기본도리가 상실되어가는 안타까운 사건소식들이 종종 들려온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존재이거늘 인간의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동경잡기』 정렬(貞烈)조에 의하면, 20여명의 인물을 조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임진왜란 때 김련(金鍊)이 상경하여 돌아오지 않자 김씨부인은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안고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잡혔다. 왜적이 치려고 앞으로 다가서자 김씨는 아이를 안고 통곡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지 않으니, 왜적이 아이를 빼앗아 산 채로 다른 숲에다 놓아두고 부인을 죽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정려는 부의 서쪽 광교(廣橋) 가에 있다.”고 전한다. 열부김씨 비각은 1671년 문중에 의해 사정동에 세워졌다가 1800년에 서악동으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 우물가에서 왜병들이 부인을 희롱하자, 물동이를 버리고 집으로 달려와, 노비 금수에게 세 살 아들 김천택을 맡겨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니 시대가 변하면서 사실과는 조금씩 다르게 전하기도 한다.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은 내남 화곡에 살면서 선비의 도리를 행하고, 효행을 실천한 참된 학자로, 그가 남긴 『화계집』은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담고 있어 지역학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열부 경주김씨가 임진왜란 때 죽임을 당한 이야기는 당시 효자ㆍ충신ㆍ열녀의 얘기를 통해 삼강오륜의 진실성을 전하고 타인의 행실을 규범으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고, 이외에도 「열부유인하씨전(烈婦孺人河氏傳)」에서 황남동 월성 손희천(孫喜天)의 아내에 관한 열부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 회복을 위한 지역의 주요한 열부와 정려 등에 대한 얘기를 뽑아 수록하였다.
조선시대 열부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가득하다. 가문의 명예를 위함도 한몫을 하였고, 조선 유교의 지나친 행실의 모순이 되기도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임금이 먼저 오륜의 법도를 돈독히 행하고 실천하면 그로 인해 백성의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고 다스리는 방도가 더욱 융성해지게 된다. 아울러 집에는 효도하는 자식이 되고, 나라에는 모두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각자가 맡은 바의 소임을 다하는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가끔은 우리 주변의 효자ㆍ충신ㆍ열녀 이야기에도 작은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열부김씨 정려각기(烈婦金氏㫌閭閣記) - 화계 류의건 돌아가신 열부 훈도(訓噵) 김련(金鍊)의 처 김씨의 정려(旌閭)가 예전에는 부의 서쪽 광교(廣橋) 주변에 있었으나, 여러 번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월의 변고를 겪으며 높았다 낮았다 자리가 바뀌면서 정려 역시 훼손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그의 현손 김도삼(金道三)이 집안 여러 사람과 함께 옛 정려의 동쪽으로 10궁(弓:1궁 145m) 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도설(棹楔:정려문)을 안치하고 작은 비각을 지어 공사를 마치고는 나[류의건]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김삼도에게 “그대는 선조의 사모함이 지극하다. 하지만 그 사적이 모두 동경기(東京記)에 실려 있고, 게다가 이 정려의 편액이 해와 달처럼 빛나거늘, 어째서 기록하려 하는가?”라 하니, 김삼도는 “비록 그렇더라도 정려각의 중수는 없어서는 안 되고, 또 책의 기록이 어찌 정려각에 거는 것과 같겠습니까? 가령 이곳을 지나는 자 모두 이것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였고, 나는 “알겠다”라 하였다.
살펴보면, 계림인 훈도 김련은 자가 정중(精仲), 호가 사천(沙川), 유학훈도(儒學訓導)가 되었다. 만력 20년(1592) 왜구가 창궐하여 경주부가 적 침입의 길목이 되었고, 이때 김련은 낙동강으로 달려갔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부인 김씨는 홀로 세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산골짝으로 숨는데, 길에서 적을 만나 붙잡혔다. 강제로 걸음을 재촉하자 김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소리 내어 슬피 울면서 한 걸음도 움직이려하지 않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아! 부인된 자 가운데 누군들 제 몸을 깨끗이 하려고 욕되게 않게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임진왜란을 만나 순절(殉節)한 자는 적으니 죽고 사는 것 역시 큰 것이다. 경주 수십리를 빙둘러 적에게 협박당해 재물(財物)을 뺏긴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정렬(貞烈)을 지켜서 죽은 경우를 골라 보자면 의당 몇 손가락 안에 꼽히니, 한번 죽는 것이 어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국가가 정려(旌閭)하고 포장(褒奬)하여 인간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니 비단 김씨 한사람을 위함만은 아닐 따름이다.
훈도 김련이 낙동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화왕산성 모임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킨 여러 사람과 함께 힘써 지켜내었고, 심지어 전투가 끝이나 돌아온 의사(義士)였으며, 의사의 아내는 마땅히 열부가 되었다. 품었던 아이는 다행히 적의 칼날을 피했고 한 노비와 지금의 수령 덕분에 두루 힘써 온전하였다. 지금의 수령 역시 의열가(義烈家)의 사람을 위해 부끄럽지 않다. 아이 이름은 김천택(金天擇)으로 장성해 무과에 급제하였고 자손이 몇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