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칠평천에는 이름 모를 풀벌레와 개구리가 밤낮을 교대로 연주하고 5월에 심은 모는 수줍음 많은 연둣빛에서 진한 녹색으로 변해간다. 제주도에서 보지 못했던 논을 경주에 터전을 두고 살면서 원 없이 보고 있다.
우리 집 창밖으로도 논이 보이고 아이들 학교 가는 길에도, 경주 시내를 향하는 길에도 양쪽을 빼꼭히 수놓은 것이 바로 논이다. 10년을 넘게 바라보니 나름 보는 눈도 생겼다. 어느 논이 모를 먼저 심었는지도 보이고, 논 주인의 부지런함도 게으름도 보이며, 논 자투리땅에 심어놓은 콩이며 깨, 고추를 보며 농사꾼의 지혜도 살뜰함도 보인다.
논의 녹음이 짙어지는 이맘때가 되면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씩 놀이터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방학이다! 학교와 학원으로 다니던 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나름의 여유가 생기는 기간이다. 나도 그냥 방학이라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엄마가 되고 보니, 눈은 신나는 눈싸움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통체증을, 방학은 신나는 기간이 아니라 육아 지옥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른들이 무엇을 연상하든 방학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리고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다니기도 하고, 캠핑을 다니는가 하면 해외로 나가는 가족들도 보인다. 그런데 아줌마의 오지랖 레이다에 이상한 것이 잡힌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여행에 아이들의 의견은 없다. 그리곤 시간을 특별히 내어, 상당한 돈을 들여간다는 것에 아이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오히려 섭섭해하는 부모들이 많을 뿐이다.
그렇다, 나도 그랬었다. 시간을 내어 요리법을 알아내고 특별하게 만들어낸 간식이나 요리에 가족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면 섭섭하다. 애초에 조리법을 찾았을 때 가족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지레짐작으로 가족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든 것으로 깜짝 이벤트로 제공했고 결과는 처참하게 망했다.
처음에는 정말 속상하고 섭섭했다. 가족들이 좋아할 반응을 생각하며 열심히 준비한 것인데, 생각지 못한 반응에 그동안의 수고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상함을 팍팍 티 내는 나에게 가족들은 미안해했다. 내가 가족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맛이 없는데, 좋아하지 않는데 무조건 환호하길 바랐을까? 아니다. 거짓 환호는 가족들이 좋아하는 것을 오해하게 되고 더 나쁜 결과들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나의 의사결정 단계에 있었다! 그 일 이후, 아이들을 위한 간식이나 남편을 위한 메뉴는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건 어때? 요런 건 어때? 맛있을까? 만들어볼까?”
주말에 아이들과 놀러 가는 것도 남편과 나의 체력과 시간을 먼저 체크한 후, 아이들에게 선택지를 부여한다. 아이들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이야기할 때에는, 예를 들어 친구네는 어디를 간다더라. 우리도 거기에 갔으면 좋겠다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거기를 선택지로 정하지 않거나, 못 한 이유를 솔직히 이야기하며 가족회의를 거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의 전체적인 만족도가 올라갔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아이들의 주체성도 발달했고 자신의 주장을 좀 더 조리 있게 이야기해서 부모를 설득하려는 협상력도 좋아졌다. 자신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고집이나 아집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부모를 설득할까 하는 고민을, 협상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과거의 일이 생각이 났다.
쌍둥이가 네 살이었을 때, 쌍둥이 중 아들 녀석이 어느 날 “엄마, 내가 이거 해주면, 요거 해줄 거야?”라는 말에 “어디서 쪼그만 게 벌써부터 엄마랑 거래를 하려고!” 하며 아주 혼쭐을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일 년 후에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아이가 생각이 커지면서 협상(거래, deal)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책을 읽은, 그날 밤에 자는 아들을 한참이나 끌어안았었다. 무더운 여름의 늦은 밤, 이름 모를 산을 타고 내려오는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우리 아이들은 꿈속에서 무슨 협상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