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의 대표작 ‘환상교향곡’은 슈베르트처럼 본인의 실연 경험에서 탄생했다. 베를리오즈가 로마대상 준비를 시작할 무렵(1827년/24세), 그는 3살 연상의 아일랜드 출신 여배우에게 푹 빠져버린다. 당시 파리에서는 영국의 한 극단이 ‘햄릿’을 공연하고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여주인공 오필리아 역을 맡은 해리엇 스미드슨(H.Smithson/1800-1854)을 짝사랑했다. 연정을 담은 편지를 건네기도 했지만, 콧대 높은 유명 여배우가 만나줄 리 만무다.
베를리오즈는 외사랑 실연의 아픔을 작품에 담았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젊은 예술가가 실연으로 고통 받다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먹은 약이 치사량보다 적었던 탓에 죽지 않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는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인과 관련된 온갖 환상을 경험한다.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환상교향곡’이다. 환상교향곡은 흔히 표제음악의 시조 정도로 간주되는데, 악장마다 제목이 있다. 1악장 `꿈, 정열`, 2악장 `무도회`, 3악장 `전원의 풍경`,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이다. 4악장과 5악장은 제목만 들어도 섬뜩하지 않은가? 이렇듯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괴로운 심경을 음악(교향곡)으로 표현했다.
훗날 환상교향곡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공포 영화 ‘샤이닝(shining)’(1980)에서 OST로 빛을 발한다. 죽음의 호텔 ‘오버록’으로 향하는 광활한 오프닝 장면에서 둔중하고 불길한 튜바소리로 끔찍한 미래를 암시한다. 한편,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스릴러 영화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1991)에서 환상교향곡은 폭력 남편의 주제음악으로 작동한다. 영화 속에서 로버츠(로라 역)는 노골적으로 베를리오즈 음악이 싫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과의 끔찍한 재회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베를리오즈의 튜바소리가 들린다.
환상교향곡은 독특한 시도였다. 슈베르트가 문학(시)을 음악에 접목시키는 것만큼이나 개인의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엔 매우 낮선 일이었다. 한편, 환상교향곡은 파격의 상징이기도 하다. 5악장 자체가 파격(고전파 교향곡은 4악장)이다. 전에 없던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도 활용되었다. 아무튼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4수 끝에 1830년 로마대상을 수상한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 유학을 (향수병에 걸려 2년 만에)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제 과거의 베를리오즈가 아니다. 로마대상 수상으로, 이탈리아 유학으로, 환상교향곡의 성공으로 그는 음악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베를리오즈가 그렇게 짝사랑하던 스미드슨이 돌아온 것이다. 환상교향곡 공연을 보고, 이 작품이 자신을 위한 것을 알고는 무척 감동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833년 전격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배우로서 인기가 떨어진 스미드슨이 베를리오즈에 집착했고, 결국 10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안타깝다. 결국 짝사랑은 추억 속에서만 간직되어야만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