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수국, 나리꽃, 접시꽃, 양귀비 등등 여름을 대표하는 꽃들은 너무도 많다. 여름꽃들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단연 나리꽃이다. 어릴 적 쇠 풀을 먹이러 산에 올라갔을 때 수줍게 나를 반겨준 노란색 나리꽃은 지금도 찾아가면 나를 반겨줄 것 같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고3 이맘때쯤 국사 선생님께서 수업 도중 한여름 무더위에 지쳐 졸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탁을 탁 치시며 교정에 붉게 핀 꽃들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 “야, 졸지마! 너희들 저 붉게 핀 꽃의 이름이 뭔 줄은 아나? 백일홍이다.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부르는데, 저 꽃이 질 때쯤이면 학력고사 칠 준비하면 된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난다. 그 후 배롱나무라고도 하는 이 꽃을 본 것은 진해 해군기지 내 이승만 별장 앞 계단에 핀 백일홍인데 오래된 나뭇가지들과 탐스럽게 핀 꽃망울로 단연 최고의 나무가 아닐까 한다. 마치 ‘꿈틀대는 황구렁이를 깔고 앉은 잔가지들, 소슬바람 손길에 온몸 꼬며 냉큼 벗는 비늘 모양을 하고 있어 항상 필자의 한여름 단상을 일깨우곤 한다.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싱그러움을 드러내는 여름꽃은 시인들과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김수호 시인의 백일홍 심은 뜻은, 하지윤 작가의 수국이 피는 자리 등등.
여름꽃을 노래한 詩들 중 아일랜드 유명시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의 시 ‘한 떨기 장미’(The last rose of Summer)는 단연 백미다. 간략하면서도 슬프고 매우 아름다운 서정적 정서를 담은 이 시는 토마스 무어가 1805년 이웃집 담장에 홀로 핀 장미를 보고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아일랜드 민요 곡조에 맞춰 전 세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베토벤, 멘델스존, 구노(Charles Gounod)를 비롯해 수많은 음악가들이 작품에 이 곡을 도입하거나 변주곡을 만들어 전해져 오고 있다.
필자는 2014년 겨울 합창단(Sligo Gospel Choir)의 일원으로 한적한 시골 교회를 방문해서 성탄절 기념 합창제에서 이 곡을 처음 접했는데 그 후 즐겨 듣는 아이리쉬 노래가 되었다. 홀로 남아 피어 있네 사랑하는 그의 벗들 모두 지고 없는데(Tis the last rose of summer Left blooming alone All her lovely companions Are faded and gone...)로 시작되는 무어의 싯구에 아이리쉬의 전통 곡조를 붙여 부르게 되면서 200여 년간 전 세계인이 애창하는 곡이 되었다. 철 지나 홀로 남은 장미꽃 한 송이를,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들이 모두 떠난 후 홀로 남은 자신의 모습에 빗댄 주옥같은 시구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가장 많이 애창되는 곡이기도 하다. 찬란했던 젊은 시절 즉 여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이 묻어 나는 가사의 의미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내가 살던 아일랜드 슬라이고 이웃 중 한 분인 Anna 할머니가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필자와 가족이 처음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Anna 할머니는 따듯한 차를 내어오면서, 종교적 이유로 술을 멀리하는 아내 몰래, 다락에 숨겨둔 아이리쉬 위스키(Bushmills spirit)로 간을 맞춰 주셨던 고마우신 분이다. 아리리쉬 볼룸댄싱 선생님이셨던 Anna는 그의 둘째 아들(Kieren) 부부와 함께 북아일랜드 근처 유명한 무도회장으로 필자를 데려간 적이 있다. 본격적인 댄스가 있기 전 필자는 Anna 할머니의 부군이 묻혀 있는 가족묘지를 먼저 방문했는데 그 남편의 묘비명(epitaph)에 “나를 위해 마지막 춤을 남겨달라(Please leave the last dance for me)”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내심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묘비명은 유명한 영화 대사라고 했다. 그 남편 되신 분도 춤꾼이었음이 분명한데 멋지게 삶을 영위하신 분이었구나 하는 부러운 마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를 떠올린 적 있다.
이제 필자도 한창이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순(耳順)을 바라볼 나이, 다니던 직장도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아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는 요즘이다. 한국 야구의 전설 김성근 감독은 항상 9회 말을 생각하고 투수진을 운영한다고 자신의 성공비결을 말한 적 있다. 나리꽃과 백일홍과 장미가 시들고 나면 꽃보다 귀한 씨앗을 품듯 청춘을 지난 우리의 삶이 멋진 춤사위로 꾸며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