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날씨가 엄청 덥다. 겨울철에 춥듯이 여름철에 더운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일부 기관에서는 얼마 전부터 이렇게 더운 혹서(酷暑)기와 추운 혹한(酷寒)기에는 고고학 발굴 현장 조사 작업을 중지한다.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인부 어르신들의 건강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맘때가 되고 이것을 보면 필자가 한 여름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발굴조사에 참여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필자가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86년 8월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Tempe)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때인 여름방학,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발굴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발굴현장은 피닉스(Phoenix)/템피(Tempe)시 남쪽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애리조나시티라는 작은 도시 사막 한 가운데 있었다. 이곳을 포함하여 피닉스와 템피시는 여름에 보통 섭씨 40~45도까지 올라가는 아주 뜨거운 곳이다. 여름에 이곳 거리를 지나다 보면 엄청나게 큰 종이컵에 얼음이 든 콜라를 한 가득 담아 걸어가면서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 낮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발굴조사 작업은 아침 5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하였다.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숙소에서 최소한 4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아침잠이 많은 필자는 새벽 4시에 깨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었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점심(보통 샌드위치나, 소세지, 콩 통조림)을 챙겨서 나와야 했다. 자동차로 발굴현장까지 가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이것을 어떻게 했나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가족(처와 당시 아들 둘)을 돌보아야 하는 의무감과 학위를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저런 궂은일을 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런 극한 작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내가 받았던 수당은 숙소 제공과 하루 일당 96불과 식비 18불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는 기쁨에 즐거운 마음으로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좋은 돈’ 이외에 몇 가지 더 중요한 것을 필자가 얻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영어 실력 향상이었다.  대학원 학과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이 발굴현장에 한국 사람은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미국 사람들 틈에 섞여 생활하는 중에 생활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것을 느꼈다. 둘째는 미국의 선진화된 발굴조사 방법을 익힐 수 있었고 또 고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냉정한 미국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의 단면을 많이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면, 내가 속해 있는 팀의 팀장이 몸살이 나서 2~3일 현장조사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수당이 전혀 지급되지 않아 아주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 팀원 두 명이서 맛있는 일식 튀김 요리를 배달시켜 먹으면서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먹어치웠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은 미국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때 필자의 발굴 경험은 남은 7년간의 유학생활과 학위를 무사히 마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1타 3피’[1石 3鳥]였던 셈이었다. 보통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고들 했다. 사실 고고학만이 아니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들게 되어 있다. 필자의 경우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우선 월급을 받지 못했고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돈,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주신 전세금, 결혼 때 주고받은 예물, 큰 아들 돌 때 받은 여러 개의 반 돈짜리 금반지 등을 모두 쓸어 담아도 유학생활 3년차에 거의 동이 나버렸으니 말이다. 아직 박사학위를 받기까지는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궁리를 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유학생활은 돈이 많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필자가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피’는 한 장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뜨거운 사막에서 발굴조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반사이익을 얻게 되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더 크게 느낀 것은 미국 고고학 학문의 벽이 높고 두꺼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유학하는 동안 돈으로도 힘들었지만 그 점이 더 힘들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동료 미국 학생들과 어깨를 조금은 나란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한 것은 넓고 깊은 호수에 조약돌 하나를 던져 넣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간신히 체면유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매년 여름 날씨가 뜨거워지면 애리조나 사막에서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생각이 난다. 십 년 유학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고생의 한 편린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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