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은 경주의 명산이자 오랜 역사의 증인으로 다양한 문화를 품고 경주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필자는 앞서 본지를 통해 포석정의 수정(水晶), 설잠스님과 은적암(隱寂菴), 오연(烏淵) 최수(崔琇)의 「유금오산록」, 계림사화의 인산서원, 경주최씨와 천룡사 등 흩어진 남산의 조각을 통해 조선의 금오산을 기억하였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백산보(白山譜)」에서 “백두산은 동북 여러 산의 으뜸이다. … 언양의 북쪽 운문산은 북으로 꺾어져 금오산, 토함산이 되는데 경주가 그 북쪽에 있다”라며 백두대간의 지맥임을 확인하였다.
남원윤씨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1762~1801)은 서울출신으로 척화론자 윤집(1606~1637)의 후손이다. 그는 178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주서에 올랐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규장각대교에 임명되었으며, 정조임금이 직접 호를 지어 주었다. 서형수(徐瀅修)․남공철(南公轍)․이곤수(李崑秀) 등과 교유하였고, 이조참판․홍문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학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해동외사(海東外史)」를 지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관련된 인물 23명과 지명 16개소에 대해 기록을 담았다. 그 가운데 금오산 주변의 포석정과 구성대․봉생암․상서장 등 여러 명승(名勝)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신라 최치원의 사적을 통해 신라의 서생(書聖) 김생(金生, 711~791)의 흔적이 서린 창림사탑비(昌林寺塔碑)를 언급하였다. 아울러 서운사비(棲雲寺碑)를 재언급하며 신라 명필의 위상을 드러냈다.
윤행임의 글 이후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1839)은 자신의 문집에서 「소화고적(小華古蹟)」을 언급하면서 금오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넣었고, 『고운당필기』「해동서가」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경주의 금오산은 신라와 고려의 불교문화와 조선의 유교가 겹쳐지면서 사찰과 암자 그리고 인물과 사화(士禍)의 불편한 동거가 계속 이어져왔다. 정작 시대별로 금오산이 갖는 상징성과 의미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한문학 연구는 그동안 학술적으로 큰 인물과 이름난 집안의 문집을 중심으로 번역작업을 우선하면서, 정작 지역학에 대한 소소한 자료는 연구가 늦어져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이라도 경주학 연구를 위해 경주출신의 인물연구와 그들의 문집을 데이터베이스 처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민관의 충분한 재정적 연구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지역에서 바라본 금오산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필자는 한문학의 관점에서 그 첫걸음을 시작해보려 한다.해동외사 금오산 - 윤행임 금오산은 조선 계림의 남쪽 6리에 있고, 지금은 경주부로 신라의 천년고도이다. 산 서쪽에 신라 비상곡수(飛觴曲水)의 포석정이 있는데,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전복) 형상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구성대(九聖臺)가 있는데, 아홉 왕이 노닐며 감상한 곳이다. 그 아래엔 서출지가 있는데 신라 때 어떤 사람이 못에서 나와 글을 바치며 나라의 변고를 고한 일로 이름 지어졌다. 그 남쪽엔 봉생암(鳳生巖)이 있는데, 신라 때 정치와 교화가 아름다워 봉황새가 날아와 울었다. 그 북쪽엔 상서장이 있는데, 신라 최치원 유허지이다. 고려왕 왕건의 흥기로 최치원은 삼한의 통합을 알고서 상서를 올렸다.
그 좌측에는 창림사 탑비(塔碑)가 있는데, 신라 김생(金生, 711~791)이 썼다. 당나라 희종(僖宗)의 건부(乾符) 원년(元年, 874)에 신라인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광계(光啓) 원년(元年, 885)에 사명을 받들어 고국으로 돌아오니 28세였다. 같은 해에 송별시를 지어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金鼇], 금오의 머리에 높고 높은 산을 올려놓았네. … 곁에 한 점의 푸른 계림이 있고,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특한 인물을 낳았네”라 하였다.
원나라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창림사비 발문에 당나라 때 신라 승려 김생이 쓴 자기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는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명각(名刻)이라도 그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옛말에 ‘어느 땅엔들 인재가 태어나지 않겠는가?’하였으니, 정말 그러하다. 고려의 사신 홍관(洪瓘)이 김생의 행초(行草)를 지니고 송나라에 들어가 한림대조 양구(楊球)․이혁(李革)에게 “이것은 신라 김생의 글입니다”라 하니, 놀라며 ‘오늘 다시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친필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왕휘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같이 잘 쓴 글씨가 있단 말인가?’라 하였다.
최치원은 도망쳐 온 사람으로, 고려 부자묘(夫子廟)에 배향되었으니, 지나치도다. 하지만 동쪽의 비루한 야만인이 고변(高騈)을 도와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는 천하에 전하여 외우지 않은 자가 없으니 또한 뛰어나다고 할만하다. 내 일찍이 신라 서운사(棲雲寺) 비석을 보았는데 한림학사 최인연(崔仁渷)이 짓고 김생이 썼다고 한다. 비석이 처음에는 조선 봉화현의 태백산에 있었으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고, 명나라 사신 가운데 이것을 구하는 자가 있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관청에 옮겨져 탁본을 요구하는 자가 많아서 아전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밀쳐서 마구간 울타리로 썼다고 한다. 세간에 서운사 비석이 창림사 비석보다 낫다고 말하지만, 조맹부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