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14세 이래로 프랑스에는 예술계의 사법시험 격인 ‘로마대상’이란 제도가 있었다. 음악부문은 프랑스혁명 후 19세기 들어 뒤늦게 추가되었다. 로마대상을 받으면 3년 동안 이탈리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소위 국비유학인 셈이다. 따라서 프랑스 신진 예술가들에게는 로마대상 수상이 장래를 보장해주는 중요 관문이었다. 아무나 쉽게 대상을 탈 수 없다. 생상스나 라벨 같은 작곡자도 수상에 실패했다. 사법시험처럼 단 한 번에 수상하는 경우는 드물다. 낭만주의의 시조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베를리오즈(L.H.Berlioz/1803-1869)는 로마대상을 무려 4수(1827-1830) 끝에 수상한다. 수상작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칸타타다.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들라크루아(E.Delacroix/1798-1863)의 동명 작품(1827)에서 영감을 받았다.(한편, 들라크루아는 바이런의 시극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르다나팔루스는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이다. 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아끼던 애첩, 애마, 그리고 노예들을 모두 죽이는 대학살을 자행한다. 보물도 버린다. 어차피 소중한 것들을 적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피는 보이지 않지만 침대 시트와 바닥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왕은 이런 아비규환의 현장을, 팔을 베고 침대에 누워 바라본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독약을 먹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처연히 죽고 만다. 이렇듯 대작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감정을 꿈틀거리게 만든다. 낭만회화의 마법이다. 이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다른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프랑스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후에 리스트(F.Liszt/1811-1886)도 이 그림에 영감 받아 오페라 ‘사르다나팔루스’를 기획한 바 있다. 우리는 그림으로 미루어보아 베를리오즈의 칸타타나 리스트의 오페라가 어떤 느낌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거나 베를리오즈는 이 기괴한 작품으로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잡게 되고,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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