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큰 건물이 진남루(鎭南樓)이다. 일반적으로 ‘루(樓)’라고 하면 중층구조로 아래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높은 곳에 바닥이 마루로 깔려있고 그 둘레는 대부분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진남루는 중층구조가 아닌 단층건물이며 또한 난간도 없다.
경사지에 조성된 산지 가람의 경우 축대를 올리고 그 위 평평한 땅에 전각이 들어선다. 이 공간으로 진입하기 전 누각이 있는데 그 아래를 통과하거나[누하진입(樓下進入)], 누각 옆을 지나야[우각진입(隅角進入)] 한다. 누하진입의 경우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다 보면 주전(主殿)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온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보면 주전이 마치 액자 안에 들어간 한 장의 사진처럼 보여 저절로 환희심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형식의 대표적인 누각이 영주 부석사 안양루이다.
진남루는 남쪽의 처마 밑에 ‘鎭南樓’라는 누(樓)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달아 놓았으나 실제 출입문은 현판의 뒤쪽인 북쪽에 있다.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어 불교의식 등 법회를 진행하기에 알맞게 건축되어 있다.
이곳 기림사 진남루는 일반적인 누각과 달리 단층건물로 주전인 대적광전과 남북 중심축을 이루는 건물이다.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기능이나 용도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건물 이름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진남루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여수에 있는 진남관(鎭南館)이다. 진남(鎭南)이란 ‘남쪽을 진압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 남(南)은 왜적을 말한다.
기림사가 있는 이곳은 동해와 가까워 신라시대부터 왜의 침탈이 잦아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기림사는 의병과 승병의 군사지휘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임란 당시 이곳 기림사의 인성(印性)스님은 279명의 승병을 모아 왜적과의 전쟁에 나섰다고 하며, 또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알려진 외동 개곡 사람인 이눌(李訥)도 의병을 조직, 이곳에 진을 치고 왜적과 대치하였다.
그리고 당시 경주부 관아에서 보관하고 있던 각종 공문서나 서적 등을 경주부의 호장(戶長)이었던 최락(崔洛)이 이곳 진남루로 옮겨 안전하게 보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래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 건물이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로부터 알려져 있으며 누각의 배치는 주불전(主佛殿)의 맞은편이다. 이것은 누각이 불교의식이나 법회를 진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능이 불전(佛殿)의 내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지금은 강의나 집회 장소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이곳 기림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진행할 때 진남루가 강의장과 숙소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진남루의 내부에는 각종 현판 33개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 기림사의 가장 오래된 사중(寺中)기록인 『기림사중창기(祇林寺重創記)』를 비롯하여 『경주부기림사중수상량문(慶州府祇林寺重修上樑文)』, 『기림사설법당중수기(祇林寺說法堂重修記)』, 『기림사중수기(祇林寺重修記)』, 『약사전개금불사기(藥師殿改金佛事記)』 등이 있다. 이들 현판은 기림사의 연혁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혀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여러 번 맞싸웠던 적장 가토(加藤淸正)가 이곳 기림사와 가까운 서생포에 진을 치고 담판하자는 전갈이 왔다. 서산대사가 몸에 작은 계도(戒刀)만을 지니고 적진에 드니 칼과 창을 든 군졸로 에워싼 살벌한 분위기였다. 가토가 대사에게 물었다.
“귀국에 제일 값진 보물이 뭐요?”
이에 대사께서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아주 가까이 그 보물이 있소.”
궁금해진 가토가 다시 묻자 대사께서 이렇게 말했다.
“황금 천 근이 걸린 바로 당신의 머리요”
당시 이곳 기림사의 인성스님은 어떻게 왜적을 혼내 주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