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윤채선                                                                     피재현 할머니가 된 원더우먼 린다 카터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 엄마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팽개치면 텔레비전이 있는 마당집에 모여 별무늬 반바지를 입은 원더우먼을 만났다 무적의 원더우먼! 엄마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치고 마당에 난 풀을 뽑고 밥을 푸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해서 달빛에 널고 뚫어진 양말을 다 깁고 잠깐 적의 공격을 받은 양 혼절했다가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밥을 안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밥을 하고 일을 하고 빨래를 하고 또 밥을 하고 그 많던 왕골껍질을 다 벗겨서는 돗자리를 짰다 린다 카터는 할머니가 되어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무기는 더욱 강력해지고 그사이 새로 생겨난 영웅호걸들과 어울려 술 한잔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여전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약을 먹고 밥을 하고 냉이를 캐고 약을 먹고 콩을 고르다가 밥때를 놓쳐서 아버지에게 된통 혼쭐이 나고 돌아앉아서 약을 먹고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끙끙 앓으며 잠을 잔다 무릎과 입안에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긴 했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슈퍼카를 구입했지만 슈퍼맨을 만나기는커녕 평생 웬수 아버지와 산다 린다 카터는 은퇴를 선택했지만 엄마는 아직도 우리의 원더우먼, 쭈그렁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별무늬 몸뻬를 입고 혼절한다 -‘원더우먼 어머니’의 기막힌 초상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입 드라마 ‘원더우먼’을 기억할 것이다. 쫄쫄이 입은 외계인도 거미 인간도 나오는 만화풍의 그 프로를 보려고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소복이들 모여들었다. 별무늬 푸른 반바지에 이마에 붉은 별까지 단, 예쁘면서 섹시한 여성 영웅 린다 카터의 모습에 어린 마음은 저마다 열광하였다. 그 인기는 30년이 지나도록 식지 않아 2007년 ‘린다 카터 버전 원더우먼 피규어’로 진화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모습으로 말이다. 시인은 “할머니가 된 원더우먼 린다 카터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자신의 엄마 윤채선을 떠올린다. 둘을 병치하면서 이 시는 전개된다. 엄마는 그녀처럼 여성 영웅인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아니라고만 말할 수 없다. 영웅이 아니라면 엄마에게 부여된 그 많은 일들을 쳐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연을 보라. 젊은 엄마는 달이 뜨고 늦은 밤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일로 “잠깐 적의 공격을 받은 양 혼절했다가” 새벽닭이 울면 또 일어나 또 일을 한다. 하루 이틀 사이에 17가지나 되는 일을 처리해내고 있다니! 문제는 늙어도 그 일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난다는 데 있다. 4연에는 끼니때마다 먹는 약이 추가되어 쩔쩔매는 늙은 엄마의 일상이 손에 잡히는 듯이 그려지고 있지 않는가? 이는 “할머니가 되어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받”은 린다 카터와 정확히 대조된다. “별무늬 반바지”와 “별무늬 몸빼”의 우스꽝스런 유사성을 바탕으로 ‘슈퍼카’와 ‘슈퍼맨’에 이르기까지 두 영웅은 극과 극의 차이로 독자를 웃겼다가 울렸다가 한다. 린다 카터의 적이 그녀를 괴롭히는 괴한과 악당이었다면, 어머니의 적은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일들이며 가사, 여기에 “밥때를 놓쳐서 된통 혼쭐”을 내는 “평생 웬수 아버지”까지 추가된다. 린다 카터가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잠깐 혼절을 한다면 엄마는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끙끙 앓으며 잠을” 자거나 자주 “혼절을” 한다. 더욱 강력해진 무기를 가진 카터와는 달리, “무릎과 입안에” 장착한 “새로운 무기”(인공관절, 틀니)는 “별 효과가 없다”. 한국의 농촌 아낙이 가정을 이루고 황혼에 이를 때까지 은퇴도 없이 평생 동안 지속되는 노동의 양이 얼마나 살인적인지 시인은 비교와 대조, 희화와 연민을 통해 ㅣ재욱한없이 당겼다 놨다가 하지만, 그녀들 생의 마지막 거주지가 대체로 요양원이라는 사실도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그분들마저도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면 우리 농촌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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