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발전은 영어로 ‘sustainable development’ 번역어인데 이 번역에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영어의 sustainable은 ‘지속가능한’이라고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지속된다(또는 지속할 수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지탱하는(지탱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의 삶터이자 활동 기반인 지구 자체가 ‘지탱가능하지 않게 된다’라는 강한 위기의식이 이 단어에 담겨 있다.
‘development’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발전’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부 국가에서는 sustainable development의 역어로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파괴가 과도한 개발에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속가능발전이란, ‘유지하고 버틸 수 있는 발전’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지속가능발전이 ‘환경, 사회, 경제의 조화로운 발전(통합적 발전)’이라는 국제적인 공통 인식이 있다. 이 경우, development는 ‘개발’보다 넓은 ‘발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경제개발의 속도를 늦추거나 개발 그 자체를 일단 중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인류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는 경우 ‘개발’보다는 ‘발전’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더욱이 ‘개발’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면, 지속가능한 ‘개발’이 개발도상국에만 해당하는 과제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선진국도 개발도상국도 함께 지향해야 할 것이 지속가능발전인 것이다.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는 시간적 지속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관점에서 생태계가 인간의 사회체계와 경제활동 체계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능력 범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속가능발전은 발전을 지속시킨다는 무한 성장의 의미가 아니라 환경 이 사회와 경제를 부양하고 지탱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류의 질적인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지속가능발전’은 Campbell(1996)이 소개한 삼각형 모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속가능발전 삼각형 모델로 불리는 이 이론은 경제성장, 환경보호, 사회정의의 세 차원을 두루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지속가능발전(윤순진 2009: 227)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1990년대 ICLEI에서 개발하였으며 지방의제 21과 연결되어 소개 되었다(ICLEI, 1996: 3-4). 그리고 지속가능발전 동심원 모델도 있다. 일반적으로 동심원 모델은 경제적 활동은 환경에 의하여 통제되는 경제적 사회적 활동이며, 사회적 영역의 일부분임을 강조한다(Wu 2013: 1002; 환경부, 2018b: 8).
지속가능발전은 발전의 특정 이행 경로가 아닌 삶, 제도의 규범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이창언, 2020e: 253). 여기에는 미래세대가 사용할 수 있는 발전의 기회가 줄어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지속가능발전을 지속가능성의 규범으로서 첫째, 환경·인간 축의 관점(생태계 서비스의 보전, 자원·에너지 제약, 환경 용량 등), 둘째, 시간 축의 관점(경제활동의 지속, 세대 간 공평 등), 셋째, 기타 관점(남북 간 공평, 생활수준, 다양성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인류의 생존기반과 관련된 규범, 미래세대에 대한 보증과 관련된 규범, 더 고차원적인 인권 등과 관련된 규범을 의미한다(森田恒幸・川島康子・イサム=イノハラ, 1992: 546-547).
일본 연구자들은 지속가능발전 규범을 ① 타인에 대한 배려, ② 다양한 위험에 대한 대비, ③ 주체의 활력으로 집약하기도 한다(白井信雄·田崎智弘·田中充, 2013; 이창언, 2020e: 253-255). 이 중 타자에 대한 배려는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 축, 공간 축, 주체 축으로 확대되는 다양한 것으로서 ‘시간 축’의 타인은 현세대에 대한 미래세대, ‘공간 축’의 타인은 지역의 의존처가 되는 타국·타 지역, ‘주체 축’의 타인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인간 이외의 다양한 생물 종을 포함한다(이창언, 2020e: 255).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실천 과정에서 지속가능발전 규범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첫째, SDGs가 여전히 복잡하고 비구조적이기 때문이다. SDGs는 지속가능발전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을 크게 묶으면서 작성되었다. 그 결과 목표와 세부 목표, 지표는 광범위한 선택 품목(menu)으로써 수용될 수는 있지만,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학습이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곳부터’라는 관점에서 SDGs의 목표와 세부 목표를 선택하게 되면 기존 대책의 정당화에 머무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성의 정당화 수단으로써 SDGs가 사용된다면 SDGs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상상력과 근본적인 대응을 연기 내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 셋째, SDGs에 개발도상국이 안고 있는 과제뿐 아니라 선진국의 과제도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 차원의 과제에 매몰될 수 있다. SDGs는 국가정책이나 글로벌 기업의 대응 과제를 포함하지만, 중소기업 및 지역이 안고 있는 과제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창언, 2020e: 254). 따라서 SDGs의 실천을 한층 더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SDGs에 대한 사회 본연의 자세, 또 그 본연의 자세를 이끄는 규범에 대한 논의와 공유(白井信雄, 2013: 69)가 실천 활동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이창언, 2020e: 253).이창언 경주대 교수, 경주대 SDGs·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