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다녀간 수많은 여행객이 시문(詩文)과 유람기행문 등을 남겼고, 그 가운데 관동지방을 유람하기 위해 경유지로 경주를 방문한 경우도 꽤 있었다.
해주정씨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은 1737년 봄 정월에 관동팔경을 관람하기위해 지리산에서 경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유람하고, 「관동록(關東錄)」을 지었다. 경유지 목적의 경주라서 세세한 기록은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당시 먼 여정을 떠나는 유람객의 준비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었고, 신라의 경주에 대한 소회가 간략하지만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관동(關東)은 대관령의 동쪽을 가리키는데, 명암 정식은 경상남도 진주에 살면서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위해 관동유람을 택하였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은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하는데, 간혹 월송정 대신에 흡곡의 시중대(侍中㙜)를 포함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정식은 관동팔경 외에 영유의 이화정(梨花亭),시중대,고성의 해산정(海山亭) 3곳을 추가로 칭송하며 승람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토로하였다.
명암 정식은 진주 비봉산 옥봉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양친을 잃고, 슬픔을 간직한 채 10살의 어린 나이로 서울에 있는 자형 강윤제(姜胤齊)와 누이를 방문해 혈육의 정을 나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삼종형 정구(鄭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과거시험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파괴한다는 생각에 학업을 폐하였다. 정즙(鄭楫), 조명관(趙明觀), 무암(无庵) 조야(趙壄,1679~1760) 등과 교유하였고, 도암 이재(1680~1746)와 주고받은 편지가 많다. 명나라 일민(逸民)을 자처하며 스스로 명암거사(明庵居士)라 하였고, 46세에 주자의 무이구곡을 따라 지리산 무이동에 들어가 구곡(九曲)을 경영하며 무이정사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관동록(關東錄) : 정미년(1737) 봄 정월 20일. 마침내 관동을 향해 떠났다. 관동은 수천리 길이라 처자식의 만류는 족히 괘념할 것이 못 되었으나, 누이와의 이별은 차마 잊을 수 없었다. 함께 거느리고 가는 자는 스님 세 명과 종 한 명이고, 여장(旅裝)으로는 통서(通書) 1권, 당률(唐律) 4권, 엽전 20꿰미, 여름 적삼, 봄옷, 도표자(桃瓢子:복숭아 모양의 표주박), 학슬침(鶴膝枕:가운데가 잘록한 목침), 바가지 1개, 대나무 지팡이 1개, 수저, 음식통, 사기로 된 벼루, 붓, 종이 1속, 버선 7켤레 등이었다. 출발해 낙동강 가를 지나고, … 양산 강가에 최치원의 자취가 완연한 임경대(臨鏡臺)가 있었다. 경주 월성으로 들어가니 고도의 옛 자취가 보기에도 참담하고 가슴이 아팠다. 무너진 궁전과 사찰을 두루 둘러보니 바윗돌을 쪼고 다듬어 인력을 크게 소비한 것이 어찌 요임금이 천자가 되어 명당(明堂)을 짓되, 흙으로 섬돌을 3척으로 쌓고 띠로 지붕을 이어 자르지 않은 뜻을 사모하지 않았는가? 내가 신라왕 때문에 천고를 향해 한번 웃는다. 토함산으로 들어가니 골굴(骨窟)이 있는데, 제일 명승지였다. 바위 끝에는 숙소가 있는데 은은하게 공중에 매달린 것이 여섯 곳이었다. 이날 밤 바위 문에 앉아 밝은 달과 짝하니 마음은 아득히 인간세상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였다(歲丁未春正月二十日 遂發向關東 關東數千里地也 妻兒之挽 有不足念 而女嬃之別 不忍懷也 所率而去者 乃三釋子一蒼頭 其濟勝之具 則乃通書一卷 唐律四卷 二十貫靑銅 夏衫 春服 桃瓢子 鶴膝枕 食瓢一 竹杖一 匙箸 饌榼 陶泓 毛穎 白雲一束 襪七事等物 初過洛東江上 … 梁山江上 有所謂臨鏡臺 崔孤雲遺跡宛然 入慶州月城 故都陳跡 慘目傷心 周覽其毁宮廢寺 則琢磨山骨 大費人力 何不慕乎茅茨土階之義乎 余爲羅王 向千古而一笑 入吐含山 有所謂骨窟 卽第一名勝 巖頭有路室 隱隱如懸空者 凡六處 是夜坐巖扃伴明月 心思茫然 不知人間何處). 이후 경주를 거쳐 태백산과 오대산을 올랐고, 설악산에 들어가 기이한 광경을 보고 감탄하였다. 특히 「관동록」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여행준비물을 소상이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종이와 벼루는 묵객의 당연한 준비물이다. 통서(通書)는 주돈이의 저서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리를 담았고, 당률(唐律)은 한시를 짓는 지침서였다. 이는 여행 중에도 바른 인간의 도리를 행하고 가는 곳곳마다 율격에 맞게 시를 지고자하는 의도였다. 여행경비 격으로 청동20꿰미를 소지하였는데, 조선시대엔 1423년 조선통보(朝鮮通寶), 1651년 십전통보(十錢通寶), 1678년 상평통보(常平通寶) 등 동전을 발행하여 상호거래를 통한 화폐의 기능을 갖췄다. 그리고 봄옷과 여름 적삼을 챙겨 여행의 편의를 갖추었고, 오침과 잠자리를 위한 간편한 베개와 소박한 식사도구 그리고 여분의 버선 등을 챙긴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명암 정식은 서울에 있는 누이를 보고자 경주를 거쳐 먼 거리를 돌아 관동지방을 다녀왔으며 유람과 가족의 정을 모두 이뤘다. 이렇듯 선현의 글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으니, 이것이 한문번역의 묘미라 생각한다.